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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채식주의자④] 작가 한강의 "내 여자의 열매"

(연재)꼬리에꼬리를무는예술 - '한강-채식주의자' 편

블루노트 승인 2018.09.02 13:43 의견 0

1996년 봄부터 2000년 봄까지 쓴 여덟 편의 작품을 모은 책 내 여자의 열매에는 여섯 번째 이야기 <내 여자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 단편소설 <내 여자의 열매>는 창작과비평 1997년 봄호에 실렸습니다.

아내의 몸에서 피멍을 처음 본 것은 늦은 오월의 일이었다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1인칭 시점으로, 남편이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는 출판사를 다니다 그만둔 후에 결혼합니다. 그러나 봄부터 아내에게는 손바닥만한 연푸른 피멍이 등허리와 배, 옆구리, 정강이, 허벅지 안에까지 들어있습니다. 그 피멍은 초여름 밤에는 큼직한 토란잎처럼 부풀어 있었고, 둔탁한 녹색이 되었습니다.

▲ 내 여자의 열매 | 한강 (지은이) | 창비 | 2000-03-15


화자가 출장을 다녀오자 아내는 베란다의 쇠창살을 향하여 무릎을 꿇은 채 두 팔을 만세 부르듯 치켜 올리고 있었다. 몸은 진초록색, 얼굴은 상록활엽수의 입처럼 반들거렸고, 머리카락은 싱그러운 들풀 줄기의 윤기가 흘렀다. 이빨도 이미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니. 이제 어머니께 편지를 쓸 수 없게 되었어요. 아침 햇살이 안방 유리창에 비칠 때 베란다에 나가 옷을 벗었어요. 벌거벗은 살에 내리박히는 햇빛이 꼭 어머니 살내 같아서,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아 어머니만 불렀어요.”

그이는 커다란 화분을 구해 와서 나를 심어주었어요. 일요일에는 진딧물도 잡아줘요. 내가 수돗물을 싫어한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아침마다 물통 가득 뒷산 약수를 길어 와서 내 다리에 부어준답니다.”

어머니, 자꾸만 같은 꿈을 꾸어요. 내 키가 미루나무만큼 드높게 자라나는 꿈을요. 베란다 천장을 뚫고 윗집 베란다를 지나, 십오 층, 십육 층을 지나 옥상 위까지 콘크리트와 철근을 뚫고 막 뻗어 올라가는 거예요. 아아, 그 생장점 끝에서 흰 애벌레 같은 꽃이 꼬물꼬물 피어나는 거예요. 어머니, 밤마다 그 꿈을 꾸어요.”

<채식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아내는 남편인 화자의 대상화된 인물이나, 꿈 이야기에서만은 자신이 이야기를 합니다. 꿈과 무의식 이야기는 다음에 나누기로 하겠습니다.

"그 가을 내내 나는 아내의 몸이 맑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중략) 가을이 끝나갈 무렵 하나둘 잎이 지기 시작했다. 주황빛이었던 몸뚱이는 서서히 다갈색으로 변해갔다. (중략)

이제 아내의 몸에는 한때 두 발 동물이었던 흔적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중략) 한때 아내의 손과 머리카락이었던 잎사귀들이 남김없이 떨어져 내리고, 입이 오그라 붙었던 자리가 벌어지면서 한 움큼의 열매가 쏟아져 나왔다. 석류알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 자잘한 열매들을 한손에 받아들고 베란다와 거실을 연결하는 새시 문턱에 걸터앉았다. 처음 보는 그 열매들은 연두색이었다. 맥줏집에서 팝콘과 함께 곁들여서 나오는 해바라기씨처럼 딱딱했다.

나는 그중 하나를 집어 입안에 머금어보았다. (중략) 다음날 나는 여남은 개의 조그맣고 동그란 화분을 사서 기름진 흙을 가득 채운 뒤 열매들을 심었다. 말라붙은 아내의 화분 옆에 작은 화분들을 가지런히 배열한 뒤 창문을 열었다. (중략) 봄이 오면, 아내가 다시 돋아날까. 아내의 꽃이 붉게 피어날까. 나는 그것을 잘 알 수 없었다.“

<내 여자의 열매>에서 아내는 식물이 되고, 남편은 아내를 화분에 심고 가꿉니다. “이제 곧 생각할 수도 없게 되리라는 걸 알지만 나는 괜찮아요. 오래 전부터 이렇게 바람과 햇빛과 물만으로 살 수 있게 되기를 꿈꿔왔어요라며 아내는 자신의 변신을 수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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