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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이 오기까지: 산업혁명의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4차 산업혁명과 자치분권 시대(10)

조연호 작가 승인 2018.10.19 12:11 의견 0

4차 산업혁명이 오기까지:

산업혁명의 역사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이 글은 전공자들의 전문적인 지식을 나열하기 위함도, 비즈니스를 위함도, 자기계발을 위함도 아니다. 필자는 졸저를 통해 현재 상황을 인식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렇게 자욱한 안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제대로 된 이정표도 없단 말인가’라는 불만을 품고 그 대안으로 ‘이정표를 만들어야겠구나!’라고 다짐을 할 수 있게 도와주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이정표를 세우는 과정에 대부분 국민이 동참해야 함을 강조하고 싶다(지방 수준에서 각 지역의 특수성을 반영한 논의가 더 효율적일 수도 있다. 자치분권도 이러한 논의 속에서 더 무르익고, 더 관심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이 대한민국에 자욱하게 안개처럼 깔려있고, 전방을 비춰주는 헤드라이트에만 의존해서 목적지를 찾아가야만 하는데, 길도 잘 보이지 않고, 제대로 된 이정표가 없어서 올바른 방향으로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버스를 운행하는 운전자는 그동안의 관성에 사로잡혀서 ‘그냥 잘 가고 있는 거겠지.’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다. 승객이 이 상황을 알고 있다면, 얼마나 불안하겠는가 그러나 불행 중 다행인지, 아니면 정말 불행인지, 승객들은 현재 상황을 잘 모른다. 그리고 역시, ‘운전자가 잘 찾아가겠지’ 하는 막연한 심정에 자신의 운명을 걸고 있다.

기존의 ‘4차 산업혁명’을 제목으로 한 책들은 이전 산업혁명의 역사를 거의 다루지 않거나, 다루더라도 그 비중이 크지 않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저자들 대부분이 이공계 출신이거나, 경영과 관련한 분야의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혹은 역사를 안다고 해도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다. 앵거스 디턴은 『위대한 탈출』에서 “과거에 대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서 더 나은 미래를 탄생시킬 기회가 많이 사라질 것이다.”라고 경고한다(『위대한 탈출』(앵거스 디턴/이현정 외 역. 한국경제신문, 2013). 그리고 『이것이 4차 산업혁명이다』에서도 과거 산업혁명을 통해 4차 산업혁명을 대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역사를 절대화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비중 있게 참고할 필요는 있다.

따라서 간략하게나마 ‘산업혁명’의 역사를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렇다고 필자가 읽으면서 감탄해마지 않던 에릭 홉스 봅의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극단의 시대』나 페르낭 브르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와 같은 대작의 수준으로 산업혁명의 역사를 다룰 수는 없다. 그리고 비록 역사를 강조하고 있지만,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식의 맹목적인 교훈을 설파하는 것은 지양한다. 역사 역시, 그 구성되는 과정에는 한계가 있기에 절대적인 교훈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의미있는 역사, 그러나 절대화는 아니다

영국의 역사학자 카(E. H. Carr)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대화의 주체는 권력자이기에 승자들 혹은 지배계층만의 역사라는 비판이 가능하다. 오죽하면, 기존의 역사를 귀족, 혹은 엘리트의 역사라고 생각해서 ‘민중’을 주체로 한 역사책들이 저술되고 있을까

(필자는 20대 시절에 소위 좌파들이 쓴 역사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지금도 현실 비판적인 주제와 관련한 책들을 많이 읽는 편인데, 역사책은 좌향으로 쏠린 책들은 많이 읽지 않는 편이다. 특히,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해서는 객관적인 사실을 근거로 하기보다 감성에 치우쳐서 저술했다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역사 이론도 대부분 서구의 것을 가져다 쓰면서 주체를 민중에 두고 있으니 어불성설(語不成說) 아닌가 ‘민중’이라는 언어 자체가 한국적인 것이 아닌데 말이다).

그리고 역사에 대한 비판은 소설가들을 통해 문학작품 속에서도 드러나는데, 2014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파트릭 모디아노의 대표작 『어둔 상점들의 거리』, 201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묻힌 거인』 등의 소설을 읽다보면, 인간의 기억을 바탕으로 해서 객관적인 시간 순서, 즉 역사를 재구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며, 많은 오류가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많은 한국인을 팬으로 거느린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멘토》도 기억이라는 것의 한계와 그 오류를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브랑코 밀라노비치는 『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에서 과거의 미래예측과 관련한 책을 읽는 과정 중에서 공통적인 세 가지 오류를 발견했다고 말한다. ‘특정 시기에 가장 중요해 보이는 추세가 미래에까지 계속되리라는 믿음’, ‘급격한 변화를 초래하는 단일 사건에 대한 예측 실패’,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주역에 대한 과대평가’로 요약하고 있다(『왜 우리는 불평등해졌는가』(브랑코 밀라노비치/서정아 역. 21세기북스, 2016)). 분명, 미래예측을 위한 저술을 하려면 과거의 사례들을 각 저자들이 충분히 검토했을 텐데, 결론적으로는 신뢰할만한 미래예측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산업혁명에 대한 역사적 발자취를 간략하게나마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자 한다.(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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