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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5)] 고난의 끝에서 찾은 자존감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2.14 10:53 의견 0

룸메이트들뿐만 아니라 우연히 친해진 동생들과도 잘 놀았다. 룸메이트들은 일상에서 잘 지냈고 그 동생들은 유흥 메이트였다. 지금은 술을 마시지 않지만 당시 나는 노는 걸 좋아해서 매주 금요일마다 술을 마셨다.

한 번은 클럽을 가자는 제안에 잔뜩 기대를 하고 나갔다. 나는 부끄럼을 많이 타는 편이라 제대로 놀려면 술의 힘을 빌려야만 했는데 역시 효과는 좋았고 나는 신나서 흔들어 재꼈다. 각종 양주며 맥주가 속에서 섞였고 취기는 점점 더해갔다.

한참을 놀다 급 피로를 느낀 우리는 숙소에서 쉬었다 다시 나오기로 했다.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랄까. 한 친구 방 룸메들이 여행을 갔다고 하길래 그 방에서 잤는데 새벽에 방주인들이 돌아왔다. 부랴부랴 가방을 챙겨서 내 방으로 돌아오니 자느라 느끼지 못했던 울렁거림이 확 올라왔다.

자 이제부터 Show Time.

나는 술을 마시면 술똥을 싸거나 오바이트를 해야 하는데 그 어려운 걸 다 해냈다. 그것도 동시에. 여담이지만 내가 필명으로 글을 쓰는 이유는 이 내용 때문이다. 내 흑역사를 적에게도 아군에게도 알리지 마라 뭐 그런 거.

변기에 앉아 똥을 싸는데 냄새가 역해서 그런지 바로 속에서 올라오려고 했다. 이런 미친! 안 돼 진짜 안 돼. 변기는 하나뿐이고 지금 내가 쓰고 있잖아 참아야 돼. 무조건 참아야 돼. 내 생애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모든 신경을 위장에 집중했다.

"참을 수 있어!", "나는 볼일을 마치고 무사히 화장실을 나온다", 시크릿 법칙, R=VD 등등 내가 아는 모든 법칙을 총동원해 내 몸을 컨트롤 하려고 애썼다. 중간 중간 신을 찾으며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역시 세상일이란 내 뜻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었고 내 몸뚱아리조차 내 편이 아니었다. 찰나에 든 '이거 못 참겠는데'라는 생각이 버튼이 되었는지, 그 생각과 동시에 내 얼굴은 바닥으로 향했고 난 내가 그 날 먹은 것과 마주했다. 많이도 처먹었네. 에라 모르겠다. 포기하면 편하거늘~. 나는 내 속을 위해 절제보다는 배출을 선택했고 시원하게 내보냈다. 얼쑤~ 똥 나갑니다~! 절쑤~ 토도 나와요~! 그래 다 가라 가! 멀리 가버려. 잠시나마 즐거웠고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밑으로도 싸고 위로도 올려내는 경험해 본 적이 있는가. 없다면 말을 마라.
정신이 돌아올수록, 내 행동을 인지할수록 경악과 공포가 몰려온다. 레이첼, 이 미친년!

똥도 싸고 토도 하고 난리도 이런 난리통이 없다. 순간 나한테 악귀가 들렸나 싶었다. 왜 영화 보면 있지 않나. 나는 가만히 있고 싶은데 엑소시즘을 하는 신부가 막 내쫓아서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내 안의 것들이 빠져나가는 그런 거 말이다. 그게 악귀라면 간지라도 나지, 왜 하필 똥이고 토냐고

양은 또 얼마나 많은지. 어휴, 짜증나. 진짜 지랄 생쇼가 이런 거구나 싶었다. 다행히 똥은 변기가 처리해 줬지만 화장실 바닥의 흔적들은 어쩌란 것인지. 다시 말하지만 나는 4인실을 쓴다. 아무것도 모르고 편히 자는 저 친구들은 무슨 죄야.

정신 바짝 차리자. 내가 해결 해야만 해. 휴지를 돌돌 말아 토사물을 쓸어 담았다. 냄새 때문에 다시 올라올 것 같은 위기를 몇 번이나 맞이했다. 사실 실제로도 한두 번 올라와서 바로 변기로 얼굴을 돌렸다.

‘나 진짜 뭐하냐’ 울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그런다고 해결 될 일은 아니기에 꾹꾹 참으며 정리에 집중했다. 대충 큰 건더기들은 휴지로 쓸어 비닐봉지에 담고 나머지 잔여물들은 샤워기 물로 한 곳에 모아 다시 담았다. 하수구에 흘려보냈다가 막히면 큰일이니까.

대충 마무리하고 바닥 청소를 했다. 샴푸를 잔뜩 바닥에 뿌리고 내 칫솔로 바닥과 변기를 솔질 했다. 금세 좋은 향기가 퍼져 울적한 내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하고 혹시 덜 된 부분이 있나 확인까지 하고 샤워를 했다. 손만 열 번은 씻은 것 같다. 새 칫솔로 3번이나 분노의 양치질도 했다. 혓바닥을 거의 뚫을 기세로.

거사를 치르고 침대에 걸터앉으니 헛웃음이 났다. 이제 술 마시지 말아야지. 고생을 있는 대로 했더니 예상치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 갑자기 내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 거다. 똥 싸고 토하고 청소할 때까지만 해도 있는 욕 없는 욕을 저승에서부터 끌어오며 극노했는데 지금은 이게 웬걸, 여기 웬 천사가 있지 싶었다.

아니 취한 와중에 책임감 하나로 청소도 깨끗이 하고 정말 대단하지 않나 어쩜 그래 내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다. 내가 저지르긴 했지만 이 거지같은 일도 꿋꿋하게 처리해낸 내 자신이 기특하고 예뻤다. 스스로 궁둥이 팡팡 두 번 정도 해주고 이불을 목까지 덮고 누웠다.

레이첼 너는 진짜 멋진 여자야. 최고다 진짜. 이렇게까지 완벽할 게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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