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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_X파일(11)] 12월 17일의 암살 사건

칼럼니스트 박광작 승인 2019.02.16 09:00 의견 0

1916년 12월 17일 밤에 발생한 라스푸틴 암살 사건은 범죄 역사상 가장 많은 화제의 대상이었고 당시 일차대전 중임에도 불구하고 한 건의 살인사건으로 전세계가 주목했던, 놀랍고 비밀스러운 사건이었다.

이 암살 사건 전개 과정은 그 자체로 외견상 명확하게 단순화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내막은 세계사적인 암살 사건이었다.

암살 장소는 러시아에서 가장 부유한 귀족 가문 유수포프(Felix Yusupov)의 호화저택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주: 이 도시는 일차대전 초부터 1924년 레닌이 사망할 때까지 독일 냄새를 지우기 위해 ‘페트로그라드’라고 명명했다가 그 후 1991까지 ‘레닌그라드’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소련이 붕괴된 후 주민투표를 통해 찬란했던 옛 이름 ‘상트페테르부르크’ 이름을 되찾아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가 되었다) 중심부를 흘러가는 모이카 강(네프 강과 연결되므로 네프 강이라고도 할 수 있다)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라스푸틴 살해 주범은 펠릭스 유수포프 공작이다. 그는 니콜라이 2세의 외조카 이리나 알렉산드로브나(Irina Alexandrowna) 공주와 결혼하였다. 그녀의 아버지는 니콜라이 1세의 손자다. 유스포프 가문은 귀족 중의 부유한 귀족 가문이었다. 그는 영국 유학 시절부터 오렌지 족으로 소문이 난 인물이었다. 부유한 그는 재산을 더 증식하는 것보다도 노는 데 더 많은 정력을 소비한 양성애자였다.

유수포프 공작은 1909년 ~ 1913년 옥스포드 대학에서 일개 소대 병력의 시종들을 데리고 호화로운 파티 생활을 하며 유학했다. 이 때 영국인 친구 레이너(Oswald Rayner)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레이너는 1916년 12월 라스푸틴이 암살 당했던 날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영국대사관 무관, 영국 비밀정보국(MI6)의 비밀정보원으로 현장에 있었다.

로마노프 왕조의 무능과 타락과 반비례해서 러시아제국 비밀경찰은 모르는 것이 없을 만큼 빈틈이 없었다. 라스푸틴에 대한 암살 음모를 이미 경찰은 탐지하고 있었다. 라스푸틴에게도 흉흉한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황실 친인척들이 서로들 수군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제국의 적대국이며 러시아와는 전쟁 동맹국인 영국의 주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무관도 임박한 저격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살해당할 것을 두려워 했던 라스푸틴도 외출하지 않아야 한다는 충고를 받아들였고 또 신변 경호도 강화되었다. 라스푸틴이 유수포프 공작의 초대를 받았을 때 그는 유수포프를 통상적으로 자주 만났으며 또 친구인 점을 감안해 예외적으로 그의 궁궐같은 저택을 방문하게 되었던 것이다.

첫 번째 액션 플랜은 이 저택의 지하실에 위치한 응접실에서 청산가리가 들어간 케이크를 대접해 독살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떻게 되었는지 이것은 효력이 없었다. 나중에 시체부검에서는 청산가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당황한 유수포프는 권총을 꺼내 라스푸틴을 향해 발사했다. 라스푸틴은 중상을 입었다. 그는 기어서 계단을 올라와 정원에 도달했다. 두마 의원으로 음모에 가담한 푸리쉬케비치(Purischkewitsch)가 정원에서 권총으로 한번 더 저격했으나 목표를 정확히 맞추질 못했다. 니콜레이 2세의 조카인 드미트리 대제후가 또 다시 권총을 쏘았지만 당시의 권총은 치명적이지 못해 라스푸틴은 아직 죽지 않았다. 암살자들은 그를 묶어 수레로 실어 암살 장소에서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는 네바강에 던져 버렸다.

*글쓴이: 박광작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비교체제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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