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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19)] 1815년 비인 회의와 통일운동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3.18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8 의견 0

분단 시대에 독일 사민당은 민족 문제는 전체로서 유럽의 평화체제에 의해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보았다. 독일보수 정당인 기민련·기사연 역시 유럽 평화를 전제로 한 독일의 통일을 주장했다. 독일 통일을 승인한 2+4 조약도 전문에 “민족자결권을 자유롭게 행사한 독일 국민들이 유럽연합을 하나의 국가로 만들려는 의사”를 표명하였고, “독일 통일은 유럽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유의미한 기여”를 할 것이라고 명시하여 독일 통일과 유럽의 평화를 깊게 결부시키고 있다. 따라서 독일의 분단과 통일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근대 독일민족의 성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 1815년 비인 회의와 통일운동

나폴레옹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참혹하게 패배한 후 1814년 영국이 주도한 연합국은 프랑스를 침공하였다. 그 해 4월 파리를 함락하고 나폴레옹을 엘바 섬으로 유폐한 후 부르봉 왕정을 복귀시켰다. 이후 1815년 2월 엘바 섬을 탈출한 나폴레옹이 다시 황제 자리에 올라서지만 6월에 워털루 전투에 패배하고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다시 유배를 가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으로 흐트러진 유럽의 질서, 즉 국경을 정리하기 위하여 열린 회의가 비인 회의다. 왕정복고라 불리는 구질서로의 회귀였다.

비인 회의 이전 독일은 외형상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내에서 300여 개의 독립된 제후국이 난립하는 중세적 봉건질서 그대로였다. 종교개혁 이후의 30년전쟁(1618~1648년)으로 피폐해진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하고, 기존 세력 관계를 인정한 것이 1648년의 베스트팔렌 평화질서(Peace of Westphalis)였다. 이 질서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헝클어진 것을 비인 회의로 정리하면서 독일은 근대를 맞이한 것이다. 과거의 봉건질서 속에서 독일민족이란 개념은 없었다. 제후의 신민이었을 따름이었다.

산업혁명과 함께 온 시민혁명으로 유럽 대륙은 근대를 맞이하게 된다. 강대국 프랑스의 간섭 등 직접적 영향권 하에 있던 독일의 제후국 역시 프랑스혁명의 영향을 직접 받게 되었다. 우선은 유럽 구체제의 강국인 합스부르크가의 오스트리아와 독일 내에서 힘을 키우고 있던 프로이센이 프랑스혁명 간섭전쟁에 참여하지만 패하고 만다. 그리고 프랑스의 간접적인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 비인 회의에서 독일 지역은 39개 국가로 정리되면서 소위 독일연방이 형성되었다. 연방이라지만 국가연합에도 미치지 못한 수준의 독립된 국가의 느슨한 연합이었다.

그런데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 특히 독일 지역에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 정의, 박애(후에 연대)의 사상을 전파하였고, 민족주의를 전파하였다. 비인 회의가 구체제 복구였다고 하지만 39개의 영방으로 정리된 독일 지역에서는 자유와 민족주의가 결합되면서 통일운동의 씨가 뿌려졌다. 그리고 18세기와는 달리 독일연방 지역이 안정되면서 연방 내 각국은 경쟁적으로 산업화에 나섰다. 이에 따라 부르주아와 노동자 계급이 성장하면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로 무장한 통일운동의 주체세력도 점차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

1834년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관세동맹이 체결되고 이를 매개로 한 북독일연맹이 출현하였다. 산업화, 국가에 의한 철도의 확대로 독일 내 특히 북독일연맹 내의 공동의 경제적 기반도 확대되었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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