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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20)] 프로이센의 승계 권리 주장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3.21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8 의견 0

이런 조건 하에서 1848년 프랑스 2월 혁명을 계기로 독일에서는 부르주아 지식인을 중심으로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소집되어 헌법 초안을 작성하면서 통일을 논의하였다. 당시 통일 논의는 개별 국가를 설득하는 것이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초부터 이에 관심이 없었고, 프로이센은 이런 통일 방식에 부정적이었다. 그리고 규모가 큰 국가인 바이에른이나 작센 역시 부정적이었다. 결국 이 회의는 뷔르템부르크 군대에 의해 해산되고 만다. 그렇지만 당시의 헌법초안은 그대로 살아남아서 그 후 바이마르헌법에 계승된다.

이후의 통일운동 양상은 오스트리아를 포함하는 대독일주의와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소독일운동으로 나누어진다.

오스트리아가 독일 통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오스트리아-헝가리 2원제국 강화와 확대에 주력하면서 대독일주의 통일운동은 동력이 떨어진다. 프랑크푸르트 회의 대표들이 설득차 베를린에 왔을 때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이들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결국 독일 통일은 오스트리아가 빠진 가운데 독일 대중 특히 부르주아가 아닌, 즉 밑으로부터가 아닌 프로이센 왕국을 중심으로 한 힘에 의한 위로부터의 통일로 나아가게 된다. 힘을 모으고 있던 프로이센은 1862년 융커 출신 비스마르크 총리가 집권하면서 빌헬름 1세 국왕과 함께 힘에 의한 통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스마르크는 의회의 반대를 물리치고 산업과 군비 증강에 나섰다.

프로이센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지역의 독일인의 귀속을 문제 삼아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어 1863년 덴마크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승리 후 당초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통치하기로 한 합의를 어기고 프로이센이 두 지역을 모두 단독으로 영유하면서 오스트리아가 이에 반발하게 된다.

이에 프로이센은 1866년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이고 쾨니히그라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면서 독일 통일 문제에서 오스트리아를 결정적으로 배제하였다.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는 이례적으로 배상금이나 영토 할양 같은 당시 패전국에 대한 전쟁 책임을 전혀 묻지 않았다. 향후 독일통일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려는 배려이자 포석이었다.

당시까지도 프랑스는 여전히 남부 독일과 라인강 지역(소위 라인란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영향으로 남부 지역 특히 바이에른 왕국의 경우 프로이센에 의한 통일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에 빌헬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경제력과 군사력에 힘을 비축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왔다. 스페인 국왕이 죽자, 프랑스가 왕위를 승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하지만 프로이센도 승계 권리를 주장하면서 개입하였다.

실제로 프로이센이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심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엠스 전보 사건 등을 계기로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는 1870년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게 된다.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포위되고 결국에는 프로이센의 포로가 된다.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간단하게 승리를 거두게 된다. 승리자 프로이센은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평화협상을 벌인 후 거울의 방에서 독일제국 선포와 황제 대관식을 가지면서 프랑스에 치욕을 가져다주었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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