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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9)] 어학원에서의 첫날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3.21 11:49 의견 0

전날 미리 학원까지 데려다주며 위치를 알려준 엘사 덕분에 무사히 학원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반배치를 위해 스피킹과 문법시험 그리고 에세이로 구성된 레벨테스트를 본다고 한다. 컴퓨터가 있는 방에 들어가니 이미 많은 학생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시아권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남미 사람들도 꽤 있었다. 생각보다 일본인들이 많아서 놀랐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한국인은 나 한 명인 듯했다. 호주에 오면서 한 가지 다짐한 것이 있다. 절대로 한국인들을 사귀지 않을 것이란 거다. 한국인들과 어울리면 절대 영어가 늘지 않을 테니까.

시험 볼 시간이 다가오자 내 옆 빈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검은 긴 생머리의 여학생이었는데 중국인 같았다. 나한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나는 내 짧은 영어에 손짓 발짓을 덧붙여 최대한 이해시키려고 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이름과 국적을 물었는데 이럴 수가.

중국인이라고 확신했던 에밀리는 한국인이었다. 같은 동양인이라면 웬만한 일본인, 중국인은 구분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구나. 사실대로 말하면 기분 나빠할까봐 최대한 놀란 티를 내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대화를 넘어갔다. 근데 이 친구도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놀란 것 같기도 했다. 방금 한국인 안 만난대놓고 이 만남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추후에 나에게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 준 친구이기 때문이다. 우연인줄 알았던 이 친구와의 만남은 운명처럼 그렇게 시작되었다.

시험 후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진행됐다. 단언컨대 영어는 이해가 아니라 눈치와 추리력이다. 모두가 원어민이 아님을 고려해 최대한 천천히 명확하게 발음을 해주었지만 당시 나는 잔뜩 쫄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다.

'only English.' 'penalty' 'assignment' 몇몇 단어들로 핵심 내용들을 유추해냈다. 여기에서는 영어만 써야 하는 것, 그렇지 않으면 패널티를 받는데 그게 쌓이면 수업을 듣지 못한다는 것. 어떤 숙제를 내주는지도 들었다.

일부러 외국인 친구들에게 말을 걸었다. 브라질에서 온 이름은 가브리엘이라는 친구였다. 브라질 사람이 이렇게 잘 생겼구나. 하지만 내 어설픈 영어에 그렇게 유창하게 대답하면 내 기가 죽잖니 너 아웃이야. 가브리엘 아웃.

필리핀 두 달 어학연수 덕분인지 내 레벨은 예상보다 높게 나왔다. 인터미디어 2. 비기너가 아니라 다행이다. 당일부터 수업에 참여할 수 있는데 수업이 나와 맞지 않으면 일주일 이내로 변경할 수 있다. 오전 수업 하나, 오후 수업 하나를 듣는데 가브리엘과 같이 듣는 수업이 두 개. 말을 유창하게 해서 레벨이 더 높을 줄 알았는데 같은 레벨이다. 학원 다닐 맛이 생긴다. 하지만 오후수업은 토론으로 진행되어서 한껏 스트레스만 받다 끝났다. 오후수업도 아웃이다.

시험 때 만난 에밀리와는 유학원이 같아 함께 에이전시를 찾아갔다. 한국에서 연결해준 에듀플래너와 함께 심카드도 사고 번호도 발급받았다. 짧아진 해를 보며 다시금 호주가 겨울임을 실감했다. 서둘러 홈스테이 집으로 향했다.

호주 버스는 한국 버스와 달리 고요하다. 광고가 없는 건 좋았지만 버스 정류장까지 안 알려주면 어쩌자는 건가. 그 불친절함 때문에 처음으로 한 외출에 길을 잃었다. 어두워서 밖이 잘 보이지가 않아 일찍 내려버린 탓이다. 호주에 온지 이틀 만에 국제미아가 되는 건가. 짜릿하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겨우 도착하니 어느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다행히 아빠랑 통화하면서 걸어와서 무섭진 않았다.

엘사와 리차드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내가 홈스테이 아버지 이름을 로버트로 잘못 기억하고 있었는데 사실 로버트가 아니라 리차드다). 오늘 간 학교는 어땠는지 얘기하는데 진짜 가족이 된 기분이었다. 씻고 자기 전에는 엄마와 통화를 했다. 비록 국제미아가 될 뻔 했지만 저녁엔 한국 가족, 호주 가족들과 보내니 가족이 늘어난 것 같아 든든하고 행복했다. 역시 가족이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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