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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21)] 독일의 민족적 통합과 독일제국의 힘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3.25 09:00 | 최종 수정 2019.11.20 13:58 의견 0

엠스 전보사건은 엠스 온천에 휴양 중인 빌헬름 1세 황제에게 프랑스 대사가 찾아와 스페인 왕위 계승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확답을 요구한 사건이다. 빌헬름 1세 황제가 쿨하게 대답한 내용을 베를린의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보내자 비스마르크가 이것을 언론에 배포하였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비스마르크가 문구에 손을 댐으로써 프랑스가 격노하는 내용이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3. 유럽평화와 독일민족(1)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1815년 비인 회의 이후에 독일 통일운동이 본격화되었다. 그러나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 소집된 국민회의에서 헌법 제정을 통한 통일운동은 좌절되었다. 이후 프로이센에 의한 위로부터 힘에 의한 통일로 완성되었다. 여기서 힘은 국내·외적으로 행사되었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관념적이었던 ‘독일민족’의 형성이 현실화되었다.

이처럼 독일민족은 일반적인 개념 즉, 동일한 언어와 관습, 종교, 제례를 같이하는 문화적인 의미에서의 민족이 아닌 프로이센에 의해 통일되고 성립된 독일제국 영역 내의 사람의 집단으로 정치적으로 규정된 개념이다. 이는 당시의 프랑스나 동쪽의 슬라브 민족 지역이나 남쪽의 라틴 민족 지역과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독일의 통일과 독일민족의 형성이 구체적으로는 프로이센에 의해 1863년부터 전쟁에 의해 달성되었다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비인 회의에서 만들어진 유럽의 평화질서를 뒤흔들면서 등장한 것이 독일제국과 독일민족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관계에서 1871년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독일제국 선포와 독일 황제 대관식은 프랑스에게 씻을 수 없는 치욕을 가져다준 것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과의 전쟁 이후 프랑스의 국방전략은 기본적으로 동부 국경, 즉 독일에 대한 것으로 마지노선은 이 때 구축된 것이다.

이후 중부 유럽의 강자로 세력을 구축한 독일과 독일민족의 움직임은 항상 유럽의 평화와 직결되는 요소였다. 통일을 이룬 후 불과 40년만인 1912년 독일은 총체적으로 유럽의 평화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프로이센 중심의 무력을 과시한 독일제국은 통일을 선포하였지만 아직 제국으로서 완전한 통합에 이르지는 못했다.

통일은 프로이센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39개의 주권을 가진 연방은 주권을 상실하고 주의 자격으로 독일제국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1871년에 프로이센 왕국 헌법을 물려받은 독일제국 헌법이 보여주고 있듯이 외교와 국방에 관해서 주권을 제국 정부에 위임하였을 뿐 그 외의 영역에 관해서는 연방 주가 주권을 보유하여 높은 수준의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 연방 주의 주권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 제국상원이었다.

통일 후 비스마르크 정부는 민주적 절차와 과정에 의한 통합이 아닌, 종래의 힘에 의한 통합정책을 유지하였다. 이는 내부 불안이나 외부의 충격에 취약한 노선이었다. 특히 신성로마제국 이래 독일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쳐온 프랑스 세력의 제압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에 따라 비스마르크는 프랑스의 고립을 목적으로 복잡한 비밀외교를 통하여 유럽에 세력균형을 구축하여 외부적 안정을 도모하였다.

특히 민족주의의 발흥으로 언제든지 폭발 가능한 발칸반도에 대한 정책 즉, 동방정책에서 협박이나 위협을 가하기는 하였지만 러시아제국 그리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과의 긴밀한 외교를 통하여 무력 충돌 없이 안정을 유지하였다. 즉,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탈리아 왕국과 3국동맹,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러시아와 3제동맹 등 독일을 중심으로 종횡으로 국제적 안전장치를 취하면서 유럽 강대국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일종의 독일제국 판 도광양회(韜光養晦) 정책 하의 평화 속에서 독일의 민족적 통합과 독일제국의 힘을 길렀다.

*글쓴이: 취송(翠松) / 재야학자. 독일사회와 정치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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