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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28)] 성당에서 만난 C와의 에피소드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4.14 10:46 의견 0

C는 나와 회장의 아파트가 있던 동네, 즉 나일스-글렌뷰-데스플레인스 한인 상권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거니라는 곳에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나이는 나와 동갑이라는데 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와 있고 얼굴 피부는 축 쳐져있어 도저히 같은 나이라고 볼 수 없었다. 어디서 노가다를 뛰나 싶을 정도로 항상 피곤해 보이는 이모님 정도로 생각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당시 약대 마지막 학기여서 residency였나 인턴이었나 하는 실습과 시험에 치여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바쁜 와중에도 S를 졸졸 따라다니며 성당에 자주 나오던 C는 S의 쌩구라가 뽀록난 이후 정신적 충격이 컸는지 학업에 열중하려고 그랬는지 한동안 보이지 않았다. 몇 달 후 연말쯤 다시 나왔는데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가 컸던가보다. 청년회 술파티에서도 마시고 내 집 근처 2차 노래방에서도 마시더니 좀 취한 모양이었다. 난 몰랐는데 노래 부르다 오줌 마려워 화장실 가다보니 복도에서 쭈그려앉아 울고 있는 거다.

왜 우냐, 누가 때렸냐 물으니 아니란다. 뭐 힘든 일이 있나보구나 그랬더니 술을 많이 먹어 그런지 술술 털어놓는다. 돈 없어 죽겠는데 학자금 론은 쌓이고 실습하기 위해 대출을 만 달러씩 또 받았는데 준비는 계획대로 안 되고 시험도 어렵고 답답하고 뭐 그런 소리다. 평소에 공부를 좀 하지 그랬냐 하려다 왠지 욕먹을 것 같아서 속으로 삼키고 어어 그래그래 참 힘들겠다 그래도 끝이 있겠지 대충 격려해줬다.

문제는 얘가 술이 좀 많이 됐는데 집이 멀어 운전하고 갈 수가 없다는 거다. 너 어떡 할래 물어봤더니 어떻게든 되겠지 맥도날드에서 커피 먹으면 될까 아몰랑이다. 때는 벌써 새벽에 나도 아침 출근이라 버리고 그냥 갈까 순간 고민이 됐다. 근데 회장 놈은 한창 흥이 올라 다른 인간들과 노래 부르며 퍼마시다 꽐라가 된 지 오래. 걔네들한테 맡기기도 좀 그랬다.

원래 난 못생긴 여자한테는 말도 안 거는데 그날 나도 술이 좀 됐는지 얘가 좀 괜찮아 보였다. 그래서 호의를 베풀어주기로 했다.

너 지금 운전해서 거니 못 간다. 난 어차피 몇 시간 뒤면 출근하러 나가야 하니 내 방에서 눈이나 붙이다 집에 갈래 했더니 좋단다. 그래서 데려와 자라고 하고 나는 출근해서 눈도장 찍고 취재 핑계로 나와 차에서 디비 잤다.

남녀간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럴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옆동 사는 회장놈은 C의 차가 주차돼 있으니 혼자 19금 상상의 나래를 펼쳤던 것 같다. 차에서 잠 좀 자고 일어나보니 전화가 수십 통에 뭔 일이냐고 메시지도 남기고 난리가 아니었다.

청년회장의 강력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날은 아무 일도 없었고 그 다음날 또 그 다음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전엔 나를 뭐랄까 좀 벌레 보듯 하다가 알고 보니 나쁜 사람은 아닌 듯 하는 정도였다.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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