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 2 : KA(2)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55)

조연호 작가 | 기사입력 2019/04/16 [14:14]

카 2 : KA(2)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55)

조연호 작가 | 입력 : 2019/04/16 [14:14]

삼국통일의 정신 - 화랑정신

 

​생거진천 화랑촌 홈페이지 참고

 

길게 설명할 필요 없는 화랑정신이다. 신라 삼국통일 과업을 이루게 해주었던 정신이다. 물론, 통일 과정에 외세 도움이 있었고 많은 영토를 잃었다는 비판도 있다. 필자도 어린 시절에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저 넓은 만주가 우리나라 땅일텐데.’라고 하면서 아쉬워했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신라가 통일했고, 그 치열했던 전쟁이 끝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문제에서 외세의 힘을 빌려서라도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비판만을 할 것은 아니다.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중심으로 이뤄진 것이니 대구와 직접적인 연관이 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1981년 대구 직할시로 승격되기 전까지 대구는 경상북도였으며, 경주 역시 경상북도에 있는 고도(古都)이다. 화랑정신이 작게는 경북 내에 크게는 영남과 전국에 걸쳐 퍼졌던 시공간이 있었다. 화랑정신은 세속오계(世俗五戒)를 토대로 당시 청년들이 심신을 단련하고, 국가에 충성하는 공동체였다.

 

대구는 화랑정신을 직간접으로 영향받은 도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정신을 현대적으로 해석해서 반영한다면, 과거 역사가 현대의 실용적인 가치로 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지방분권과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하면서 세속오계 중 임전무퇴(臨戰無退)는 자신감으로, 살생유택(殺生有擇)은 친환경적인 의식으로 재해석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삼국통일을 생각할 때 화랑정신은 승리의 정신이다. 이러한 정신이 대구의 근저에 뿌리내리고 있다.

 

 

독립운동의 정신 - 국채보상운동

 

​출처 : 영남일보 교육매거진 참고 

 

1907년 1월 30일 200여 명이 대구 광문사에 모여서 특별한 회의를 한다. 대구 출신의 서상돈(근대문화 골목길 투어 중에 서상돈 고택을 볼 수 있다)을 중심으로 국가채무를 국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이니 국민의 힘으로 갚자는 제안이 있었다. 이에 참석자들은 즉각 그 제안을 받아들여서 모금 운동을 결심한다. 이것이 국채보상운동의 시 발점이다.

 

1905년 대한제국은 을사늑약으로 외교권과 군사권을 모두 잃었고, 일제는 부당한 차관을 강요해 대한제국은 1300만 원에 이르는 부채가 생겼다. 당시, 이 금액은 대한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고, 따라서 이를 계기로 일제는 대한제국을 본격적으로 식민화하려고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국사 시간에 배우는 국채보상운동은 반드시 외워야 하는 단어였고, 주관식으로 곧잘 나왔다. 그런데, 그 시발점이 대구라는 사실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구는 구한말 국가의 온전한 유지와 독립을 위해 무던히도 애쓴 지역이었다.

 

이후에도 대구는 일제 식민치하에 강하게 반발하여, 3•1운동 당시에 만세운동을 전개했고, 비밀조직을 만들어서 항일투쟁도 계속 이어갔다. 나라 잃은 슬픔을 포기가 아닌, 국권 회복과 독립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쟁했던 지역이 바로 대구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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