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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13)] 언제 어디서든 내 중심을 똑바로 잡을 것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4.18 17:48 의견 0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고 노래를 부르던 당시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말렸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다녀온 여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때문이었다.

아무리 평범하고 참한 여자라도 갔다 오면 대부분 문란해진다는 말이 있을 때였다. 호주 워홀 다녀온 여자들은 결혼 중개 업체에서도 등급을 한 단계씩 내린다는 웃지 못할 소문도 있었고. 하지만 그게 나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내가 행실을 똑바로 하고 떳떳하면 그만이고 혹여 그런 편견으로 나를 볼 사람들은 내 쪽에서도 굳이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호주에서 생활해보니 왜 그런 얘기가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학교 개원기념 행사 준비에 한창일 때였다. 사교성이 좋은 여자애가 먼저 다가와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썩 좋은 주제의 이야기는 아니니 이 아이를 본명도 실제 영어 이름도 아닌 '올리비아'라 하겠다. 아무튼 난 한국인에게 내 시간과 돈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당시 늘 집과 학교만 왔다갔다하던 터라 별 고민 없이 수락했다.

올리비아는 20살이고 호주에서 대학을 가기 위해 어학원에서 공부 중이었다. 아르바이트도 안하고 모든 생활비와 학비를 집에서 대주는 것 같았다. 어린 나이와 풍족한 가정이 부러웠는데 정말 짜증나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29살인 남자친구에 대한 고민이었다. 한인식당 셰프인데 일이 바쁘고 힘들어서 연애 초반 때와 달리 지금은 전혀 데이트도 못하고 있다고 한다. 더군다나 한 집에서 같이 사니 늘 집에서만 시간을 보낸단다. 이런 미친. 욕이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20살에 오늘 처음 본 아이라는 것을 감안해 묵묵히 들어주기로 했다.

바쁘신 그 남친 놈은 평소 친하게 내던 언니의 친동생인데 소개받았을 당시 애인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소개는 소개팅이 아닌 말 그대로 ‘소개’였다. 그놈은 애인과 트러블이 잦았고 결국 헤어지고 올리비아를 만났다. 본인은 장황하게 설명했지만 나에게는 그저 '아, 환승 이별한 쓰레기를 이 철없는 아가씨가 주웠구나'라고 정리될 뿐이었다. 자신의 배려를 점점 당연시 여기고 데이트는 조르고 졸라야 몇 주에 한 번 하고. 아니 왜 만나는 거지 공부하라고 호주까지 보냈는데 한국 남자랑 동거하고 맘 썩고 있는 걸 알면 부모님이 퍽이나 뿌듯해 하시겠구나 싶었다.

그 남자 결코 좋은 사람 아니라고 나이만 먹었지 어른스러움이라고는 1도 없는 남자를 왜 전전긍긍 하며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영어 공부는 둘째 치고 너의 인생에도 도움이 안 된다며 어르고 달래 보았지만 당연히 씨알도 안 먹힌다. 이제는 사랑에 힘들어하는 자기의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나한테 얘기한 건가. 기껏 내 고민처럼 들어줬건만 쯧쯧. 마음 같아선 부모님 전화번호라도 알아내서 이 모든 상황을 말씀드리고 싶지만 내 오지랖이 한 뼘 모자란 태평양이라 그만 두었다. 누누이 말하지만 내 코가 석자다.

올리비아는 그저 자기 얘기를 들어준 것에 만족했는지 표정이 좀 편안해졌다. 나도 내면의 표정은 매우 썩었지만 겉으로는 온화한 미소와 걱정하는 표정으로 위로를 해줬다. 그러면서 살살 헤어지라는 압박도 넣었다. 이후 종종 마주칠 때마다 계속 그 얘기를 하니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이 아이는 자연스레 멀어졌다. 남의 연애사에는 깊이 관여하는 게 아니다. 어차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할 테니까.

이것만으로 내 딸은 호주 안 보낸다, 유학 안 보낼 거다 결심한 것은 아니다. 솔직히 아직 있지도 않은 딸이지만 가고 싶어 한다면 어디든 보내주고 싶기도 하다. 해외에서 살아보면 한국에서는 하지 못할 값진 경험을 하기도 하고 나 자신도 몰랐던 나를 찾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본인의 마음가짐과 행동에 달린 것이다. 어디를 가든 분명한 목표와 그것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어야 한다. 파도치지 않는 바다가 없듯 고비와 어려움이 어찌 없을 수 있겠다만 돛을 제대로 달고 목적지를 분명히 해야 결국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흔들려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게 흔들렸으면 좋겠다. 철없는 남자친구 같은 거 말고, 제발 좀, 이라고 23살까지 모태솔로였던 레이첼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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