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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홀 In 호주(14)] 모른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칼럼니스트 레이첼 승인 2019.04.25 12:31 의견 0

흔히 영어는 자신감이라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외국인 앞에서 입도 한번 못 떼보고 어버버 거리는 일이 잦아지면 남아있던 일말의 자신감도 사라진다.

필리핀에선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선생님 덕분에 영어에 대한 내 자신감이 조금씩 고개를 들었다. 물론 이 자신감은 호주에서 저 멀리 지하로 내리 꽂아졌지만.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남미 애들은 왜 이렇게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거야 기죽게. 그렇게 다 알아들을 것처럼 속사포로 랩을 쏟으면 내 입장이 많이 난처하단 말이다 이 문디 자식들아.

알파벳 거부반응이 있는 내 뇌와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귀 사이에서 가장 바쁜 것은 눈치다. 그들의 표정과 몸짓 상황을 종합해 상황을 유추하며 대화를 이어나가야 한다. 언어는 원어민과 부딪히며 계속 하면 는다고 했지. 구겨진 자존심을 애써 외면하며 나를 영어 바다에 던졌다. 결과는 늘 좌절이었다. 매일 밤마다 ‘이대로 잡이나 제대로 구할까 돈 없어서 노숙해야 하는 거 아닌가’ 생계라는 묵직한 고민에 짓눌려 한숨과 함께 잠들기 일쑤였다.

내가 정말 못 견디는 건 외국어를 못 알아듣는다는 사실보다 매번 이해 못하는 말들을 멋쩍게 웃으며 알아듣는 척 서 있는 나 자신이었다. 정말 곤혹스럽지만 멀미가 나는 영어들 사이에서 무작정 버티고 서 있었다. 어울리지 못하면 소외된다는 두려움과 계속 듣다 보면 들릴 거라는 막연한 희망이 공존했다. 낯가림이 심한 내가 밤마다 피곤에 찌들어도 할 수 있었던 일은 미련할 정도로 그들과 어울리는 것뿐이었다.

세 번째로 참여한 한국인 모임은 내 숨통을 트게 해주었다. 한국인과 어울리기 때문에 영어가 늘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도 심했지만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안도감에 편하기도 했다. 학원은 ONLY ENGLISH ZONE이었지만 행사 준비를 위해 모여 있을 때는 모국어를 쓸 수 있도록 해줬다.

행사에 쓰일 무궁화 꽃을 열심히 만들며 속으로 '역시 이들과 어울리지 않아야지.'라 다짐을 골백번도 더 했다. 듣기 싫어도 들리는 그들의 TMI를 들으니 이들은 공부가 아니라 연애를 하러 온 것 같았다. 해외로 떠나기 전 참여했던 워킹홀리데이 오리엔테이션에서 한국인들과 사귀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표현했던 강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땐 ‘엥 그런 미친놈들이 있단 말이야’ 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너무나도 많았고 그것도 가까이에 있었다.

듣는 둥 마는 둥 아, 그렇구나 하며 기계적으로 대답만 했는데 어느 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부족한 재료를 찾기 위해 우르르 몰려 나갔기 때문이다. 소수만 남은 강의실에서 도망갈 눈치를 보는 찰나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나한테 뭐라고 말씀 하시는데 대체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장난기 없는 선생님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내용은 꼭 알아들어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Sorry, I coudn't understand. Please tell again another student."

못 알아듣겠으니 다른 학생에게 설명해달라고 말하는 내 말에 돌아오는 대답은 "Good." 예상치 못한 칭찬에 조금 얼이 빠졌다. 다른 학생들은 못 알아들어도 그냥 "Yes."라고 하는데 모르면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칭찬해 주셨다. 왜 쉬운 길을 놔두고 어렵게 빙빙 돌아갔을까.

그 이후로 나는 분위기를 깨지 않는 선에서 모르거나 이해하기 힘들면 모른다고 얘기했다. 이것도 모르냐며 무시당할까 염려했던 것과는 달리 선생님과 외국인 친구들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더 이상 곤혹스럽지 않고 마음도 편해졌다.

우리말이 아니기 때문에 외국어를 못하는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상황이지만 그동안의 나는 왜 이것도 모르지.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하지. 나를 비난하고 깎아내리기 바빴다.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고 나를 내려놓으니 모든 상황이 편해졌다. 모르면 배우면 되는 거고 그러다 보면 영어에 자연스러워진다. 오히려 아는 척 하다가 오해가 생기면 더 큰일이지 않는가.

무언가를 처음 시작할 때 자존심, 욕심을 내려놓고 부딪치다 보면 훨씬 더 빨리 습득할 수 있다. 남들만 우러러보며 땅굴 파기 전에 있는 지금의 나를 인정하고 힘을 다해 올라가면 언젠가 ‘이걸 안 보고 죽었으면 후회 했을거야’ 하는 멋진 하늘이 반겨주는 날이 올 것이다.나에게 영어회화가 그러했고 호주 생활이 그러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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