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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플라뇌르’의 산책을 마치며(1)

대구의 플라뇌르 대프리카를 말하다(74)

조연호 작가 승인 2019.05.15 11:09 의견 0

플라뇌르는 산책자, 산보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미술사를 훑어보면 인상파에서 방관자로 표현되어 있다. 방관자에 적극성을 부여하면, 관찰자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현상을 보되 당사자가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이 관찰자이다.

필자는 대구에서 3년 남짓 거주하면서 처음에는 방관자로, 그리고 현재는 관찰자로 살고 있다. 가족들은 이미 대구 시민으로서 살아가고 있는데, 필자는 여전히 수도권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처음에는 대구에서 오래 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고, 현재는 갈등 중이다. 주소를 옮기는 것은 어렵지 않은데, 막상 옮기려 하니 마음의 명분이 없다. 거주하는 곳에 마음을 두지 못하고 한동안 고독한 혼자만의 생활을 즐겼다. 그러다가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은 지내 온 시절을 회상할 때 무책임하다는 자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플롸뇌르의 입장에서 대구를 살펴보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다음 단계를 생각한다.

‘플롸뇌르’에서 ‘앙가주망(engagement)’으로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는 실존주의가 자칫 개인에만 함몰될 수 있다는 오해와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앙가주망’을 제안한다. 즉, 개인의 소우주에서 사회라는 대우주로의 참여로 확대한다. 단순히 개인으로서 실존적 존재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에 참여함으로써 적극적인 개인의 실존을 깨닫는다.

현대의 문제점을 다룬 많은 책은 공통적으로 개인주의를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는 개인주의의 성향이 강해질수록 공동체적 구조물은 허약해지고, 독재 권력에 취약해진다고 말한다.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의 대가’에서 두 개의 계층이 하나의 경제 안에서 살아가면서도 서로 알지 못하고, 다른 집단이 어떻게 사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이중경제(dual economy)로 표현하기도 한다(금수저, 흙 수저로 나누는 우리 사회도 다를 바 없다)

그리고 대안으로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 운명 공동체라는 인식을 함유하며, 기회와 공평성에 대한 사회적 약속이 유지되는 사회, 즉 공동체를 제시한다. 앞서 말한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에서도 공동체만이 민주주의가 훼손되고 약화되는 현실의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거대한 불평등’에서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불평등을 다시 언급하면서 불평등은 20세기 자본주의가 낳은 것이 아니라 20세기 민주주의가 낳은 문제라고 하면서, 공정성을 보장하는 경쟁과 평등한 기회의 공동체 의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제 나 혼자 잘 살던 시대는 지나갔다. 거미줄처럼 연결된 현대는 어느 한 곳에서의 문제 해결이 도처의 문제 해결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이런 의미에서 사회 참여와 공동체에 대한 관심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2010년 영국의 내각 기구로 설립된 ‘행동 통찰 팀’의 결과를 바탕으로 출간된 ‘싱크 스몰’에서는 타인을 위해 사회적 지출을 한 사람이 자신에게 지출한 사람보다 훨씬 행복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리고 사회적 관계를 강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도 행복과 관련 있다고 한다. 반대로 사회적 고립은 매일 15갑의 담배를 피우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사회 참여는 개인에서 공동체 구성원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 전환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는 지역이 새로운 시대의 주역이 될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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