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인터뷰) "용기를 내 거리로 나온 소시민들의 기억" - 창작판소리 '방탄철가방'의 소리꾼 최용석

5.18광주민주화운동 39주년 “기억이 기록으로, 기록이 기억으로”③

윤준식 기자 승인 2019.05.17 15:28 | 최종 수정 2023.07.05 02:21 의견 0

▲ "기억이 기록으로, 기록이 기억으로" 특집으로 만난 두 번째 인물은 2014년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창작판소리 <방탄철가방>의 소리꾼 최용석이다. 만남을 위해 그가 운영하고 있는 카페 <당산동커피>를 찾았다. 홀로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바쁜 와중이었지만, 취재로 찾아온 우리를 밝은 얼굴로 맞아주었고, <방탄철가방>이라는 또 다른 기록물을 만들게 한 자신의 기억을 하나 둘 이야기해 주었다. ⓒ 김혜령 기자


¶ 어느 날 목포에 나타난 시민군에 대한 기억

▶최용석이 기억하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은 어떤 것인가요

☞최용석: 저는 당시 목포에 살았고, 유치원에 다니던 때라 5.18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겪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목포사람들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목포사태>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같은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제 기억으로도 목포에서도 민중시위가 함께 일어났어요. 거리에는 시민들이 삶을 살아가는 모습 동시에 시위대의 모습들이 가득했죠. 제가 살던 곳 근처 파출소가 불에 타던 모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또 시민군들이 무장한 상태로 버스를 타고 광주에서 목포로 넘어왔습니다. 광주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기 위해서였죠. 소총을 든 광주시민들이 버스를 타고 목포에 온 겁니다. 한 마디로 정부가 사라진 상태였죠. 당시는 민주화운동이 아니라 <광주사태>라고 이야기했었죠. 군인들이 사람들을 쏴 죽였다는 정도만 알았을 뿐, 어린 저는 진상을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을 중학생이 되어서야 처음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광주에 가톨릭회관에 갔다가 5.18 민주화 운동과 관련된 사진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당시 현장을 담아낸 사진은 중학생이 볼만한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처참하게 죽은 시체들, 처절하게 저항하는 현장의 사진들을 보고 놀랐죠.

이후 대학에 진학해서 광주 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동료들과 직접적으로 경험했던 어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제 기억은 아주 단편적인 것들이었죠. 그렇게 사람들 모두는 자신이 기억하고 알고 있는 5.18이 있죠. 그래서 기억 속 5.18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 작품(창작판소리 <방탄철가방>)을 선택했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부조리한 사회에서 벗어나 내 인생, 내가 사는 사회, 더 나아가 이 세상을 변혁하고자 했던 사람들에게 이정표와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모두가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제 몸에 새기기 위해서 공연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 초연 당시 <방탄철가방> 포스터. <방탄철가방>의 줄거리는 크게 둘로 나눠진다. 시골청년 '최배달'이 짝사랑하는 '애경'을 쫓아 광주에 있는 중국집 '평양반점'의 배달원이 된 과정을 이야기하는 앞부분, 어느 날 광주에 들어온 공수부대와 싸우다 도청을 사수하는 시민군에게 300인분 짜장면 배달을 간다는 뒷부분으로 나뉜다. ⓒ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 "카빈 소총을 들고있던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공연예술을 통해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게 되었는데요... 창작판소리 <방탄철가방>은 시골청년 ‘최배달’이 짝사랑하는 ‘애경’을 따라 광주로 가게 되고 중국집 배달원이 된 후 5.18을 맞닥드리게 되는 이야기로 펼쳐집니다. 작품을 구상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무엇인가요

☞최용석: 어떤 이야기로 5.18광주민주화운동을 풀어가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어린 시절 문득 기억에 남았던 한 사람이 떠올랐습니다.

버스를 타고 내려온 시민군 중 한 청년이 차창 밖으로 장난스레 제게 카빈소총을 들이댔는데, 어린 제게는 너무 무서운 기억이었죠. 그 때 그 상황이 제 뇌리에 한 장의 사진처럼 남아있었습니다.

문득 그 때 그 청년의 삶이 궁금해졌습니다. “저 형은 왜 저기에 있었지”, “이후 어떻게 되었지 그 형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청년의 이야기를 토대로 상상력을 발휘하며 작품을 구성했습니다.

당시 농촌에 일자리가 없어서 도시로 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청년도 시골 사람이었는데 고향을 떠나 도시(광주)로 일하러 갔던 사람일 수 있죠. 또는 섬에서 목포로 올라온 사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5일장을 다니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겪었던 이야기들을 수집해 모두 녹여냈습니다.

▲ <방탄철가방>은 판소리라는 장르의 특징을 십분 활용해 소시민의 일상 이야기로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를 잘 설명하면서도 그 평범한 일상을 부숴버린 비극을 표현한다. 상식적으로 배달원이 사용하는 철가방은 총탄을 막을 수 없다. 하지만 '방탄철가방'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은 소시민의 평범한 삶이 쉽게 부서질 수 있음은 물론 평범한 소시민이 민주화를 위해 거리로 나서는 용기를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면서, 극에서도 중요한 소품으로 활용된다. ⓒ 판소리공장 바닥소리

¶ 광주를 겪지 못한 사람, 기억 못하는 세대를 위한 작품되길

▶슬픈 역사의 한 장면으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힘들었던 점도 많았을 텐데요

☞최용석: 5.18의 슬픔이 제 아픔으로 와 닿지 않는 점이 가장 큰 고민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 아픔을 내 것으로 만들고 공감하고 싶었습니다. 국가 폭력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사람들이 무고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 이유는 정권 찬탈의 야욕 때문이었죠. 아마 당시 가장 많은 죽음을 맞은 사람들은 평범한 삶을 살았던 소시민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의 고통을 내 것처럼 받아들이고 소화해내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습니다. 또 극을 준비하고 공연하는 내내 극이 주는 무게감 때문에 마음의 병을 크게 앓기도 했습니다.

▶광주를 기억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들, 광주를 겪지 못한 분들에게 <방탄철가방>이 어떤 기억로 남길 바라시나요

☞최용석: 이 이야기는 도청에 끝까지 남아 항쟁했던 영웅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용기를 내서 거리로 나온 소시민들의 이야기이지요. 광주 민주화 운동은 소시민 한명 한명이 자신의 삶을 내어주었기에 가능한 역사였습니다. 항쟁 기간동안 광주의 시민 공동체는 순수한 목적으로 하나가 되었고, 총을 들었습니다. 이름 없이 쓰러져가고, 횃불을 들고, 분수대 앞에서 시위대를 이뤘던 사람들이 기억되길 남길 바랍니다.

광주에서 시위를 하던 사람들도 자국의 군대가 국민에게 총을 들이대고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짐작하지 못했을 겁니다. 국가 폭력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국가권력은 양날의 칼입니다. 방심하면 국민들에게 총을 들이대며 압박하고 억압할 수 있죠. 누구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 사이에서 투쟁하던 군중들의 역사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 왜 4년간 <방탄철가방> 공연이 없었냐는 질문에 그간 공식적인 공연을 피해다녔다는 소리꾼 최용석. 5.18을 작품으로 녹여내고 공연하는 과정에 마음의 병을 앓기도 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서 시작한 일이기도 하지만 <당산동커피>를 운영하며 일상을 하나하나 세우면서 다시 작품을 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 ⓒ 김혜령 기자

¶ 올 가을 10회의 공연으로 다시 찾아오는 <방탄철가방>

▶<방탄철가방>의 2014년 초연과 2015년 재연 이후 4년이 지났습니다. 주인공 ‘최배달’은 당시 사건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던 한 소시민으로 작품 속에 투영됐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올해 초연 후 4년 만에 다시 10회의 공연을 하신다고 들었는데, 전과 달라지는 점은 없을까요

☞최용석:2014년 초연 후 매해 공연하다가 작년에 건강상의 이유로 공연을 못하고 1년 만에 다시 공연을 하는데요. 이번 공연에는 추가하고 싶은 에피소드가 있어 극의 길이가 10분 정도 늘어났습니다. 판소리를 보셨던 분들이 마지막 결말이 너무 절망적이라고 하는 견해가 많아서 결말부분을 조금 수정했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결과가 모두가 다 죽은 ‘절망’이 아니라 이들의 죽음을 통해 새로운 내일을 바라보자는 메시지를 더 살렸습니다. 당시 도청을 지키던 이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죽음 뒤에 무엇이 펼쳐지는지를 무대에서 표현해보고 싶습니다.

또 <판소리공장 바닥소리>의 정지혜 대표가 협력연출로 참여해 소리극으로서의 완성도도 더 높아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창작판소리 <방탄철가방>이 어떤 기록물로 남겨지길 바라시는지요

☞최용석: 내년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4년 전에도 광주에서 공연을 올렸지만, 40대를 넘기기 전 <방탄철가방> 공연을 또 다시 광주에서 하고 싶습니다. 또, 10년 이상 <방탄철가방> 공연이 이어져 후배들도 이어가는 공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