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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9)] 기독교인들이 하나가 된 3.1운동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5.21 10:45 | 최종 수정 2019.07.04 01:52 의견 0

¶ 주류가 아닌 비주류 기독교인들이 창설한 신민회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점은 매우 특이합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온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독립운동의 실패가능성을 염두하며 3.1운동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물론 당시의 암울한 상황을 봤을 땐 현실적인 판단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미국인 선교사들은 반대했습니다.

미국인 선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는 대신 성경을 읽고 기도를 드리는 개인 신앙과 윤리회복에 에 집중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인 1907년, 기독교인들에게 큰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평양 대부흥운동입니다. 그러다보니 독립에는 별 관심이 없고, 개인 신앙을 추구하던 세력이 당시 기독교의 주류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민족의 아픔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기독교인이지만 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1907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신앙에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며 기독교인이면서 독립운동가인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단체가 ‘신민회’입니다. 이 때문에 신민회의 구성원 8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사람을 죽이고 투쟁을 해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교리에 위반되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개인의 신앙만 내세울 수 없다며 민족의 구원과 독립을 강하게 주장합니다. 이들은 당시 기독교 진영에서도 소수의 세력이었지만 독립을 위해 활발히 움직였습니다.

신민회의 중심 구성원들은 이회영, 안창호, 이승훈, 이동영 등입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라는 공통점은 있었지만 개개인의 사상적 색깔은 모두 달랐습니다. 그렇지만 민족의 독립과 국권회복에는 함께 활발히 참여합니다. 신민회 활동을 하던 기독교인들은 후일 외국으로 나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해나갑니다.

▲ 왼쪽부터 남강 이승훈, 우당 이회영, 도산 안창호. 이들은 신민회를 결성해 주요인사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 위키백과


¶ 34번째 민족대표, 파란 눈의 독립운동가 스코필드 선교사

다시 미국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당시 미국인 선교사들은 일본에 협조적인 성향을 띠었습니다. 개인의 신앙에 집중하다보니 민족, 독립은 등한시 여겼습니다. 오히려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을 것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독립을 위해 열심히 움직인 파란 눈의 선교사도 있었습니다. 기독교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장하는 프랭크 스코필드 선교사입니다.

스코필드 선교사는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교수로 한국에 오게 됩니다. 그는 3.1운동의 과정을 사진으로 남겨 외국에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또한 화성 제암리, 수촌리 마을 학살 현장을 방문해 보고서를 남겨 외국에 발표하기도 합니다. 1919년 11월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사건으로 김마리아를 비롯한 여성들이 수감되자 고약을 넣어주는 등 이들의 옥바라지를 합니다. 이에 일본은 스코필드를 과격한 선동가로 낙인찍고 강제 추방합니다.

스코필드는 외국인의 신분으로 국립 현충원에 묻힌 유일한 사람입니다. 또한 오늘날 그를 ‘파란 눈의 34번째 민족대표’라 부르기도 합니다.

▲ 1968년 공로 훈장을 받은 스코필드 선교사 ⓒ 호랑이스코필드기념사업회 홈페이지


¶ 기독교 탄압을 이겨내기 위한 기독교 세력의 결집, 3.1운동

신민회를 설명하며 소개했듯 신앙에 대한 견해 차이로 기독교가 주류와 비주류로 나뉘어져 있었고, 주류 기독교 세력은 독립운동보다 신앙부흥에 집중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1910년부터 분위기가 바뀌게 됩니다.

1910년 들어 일본이 민족 탄압을 자행하면서 종교도 탄압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따라 개인 신앙을 추구하던 사람들도 불만을 품기 시작합니다. 일제의 폭력을 자각하며 독립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신민회 활동을 지지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주류 기독교 세력들도 민족을 구해야한다는 뜻을 품게 되었고 대거 3.1운동에 동참하게 됩니다. 최초 신민회에 가담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했고, 국내에서는 이승훈이 주축을 맡았습니다. 여기에 평양대부흥운동을 이끌었던 길선주 목사가 합류해 33인의 일원이 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색채의 기독교 세력이 하나로 결집해 하나의 색을 띠기 시작하자 3.1운동이라는 거사가 구체화될 수 있었습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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