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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12)] 서로다른 독립운동 노선으로 갈라진 임시정부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6.18 10:11 | 최종 수정 2019.07.04 01:56 의견 0

우리나라의 독립운동 노선은 크게 3가지로 나뉩니다. ①이승만 대통령을 필두로 한 외교론, ②안창호를 중심으로 일어난 실력양성론, ③이동휘의 무장투쟁론입니다.

이승만은 외교를 통해서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은 기대를 걸었지만 외교정책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이승만의 지지도 역시 하락합니다.

이승만 외교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미국에게 위임통치를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자주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일본에서 미국으로 변화된 식민통치 제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런 사실을 알고 독립을 위해 노력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승만에게 등을 돌립니다.

이 문제로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독립운동가들도 등장합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을 ‘이완용보다 더 나쁜 인물’이라고 평가합니다.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지만, 이승만은 존재하지도 않는 국가를 미국에 팔아먹었다는 것이죠. 이런 분위기를 틈타 무장투쟁론으로 무게중심이 실리게 됩니다. 계속되는 분열 속에서 안창호가 중재를 위해 양쪽으로 노력하지만 한번 시작된 분열을 돌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입니다.

▲ 왼쪽부터 이동휘, 이승만, 안창호. ⓒ픽사베이

안창호는 서북지역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민족의 지도자로 성장한 인물입니다. 그러나 평안도로 대두되는 서북지역은 조선시대 내내 심하게 차별받던 지역이었습니다. 문제는 임시정부 내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진영은 이승만 계통과 서북지역의 평민계층 출신으로 나뉘었다는 겁니다. 양반 출신들이 평민들과 같이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도 평민을 무시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이에 분열을 막으려는 안창호의 중재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다 팔아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이회영 선생 역시 초기 임시정부에 참여했지만, 임시정부를 만들면 분명 파벌싸움이 생겨 임시정부가 잘 운영되지 않을 것이라 비판했습니다. 이 예상이 적중합니다. 문제는 이승만 뿐 아니라 이동휘에게서도 발생했고, 임시정부를 반대하는 세력까지 등장하며 많은 진통을 겪게 됩니다.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연해주로 이주해서 살았는데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진영을 구심점으로 모였기 때문에 이들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장투쟁이었습니다. 이 또한 내부적으로 갈등을 빚어내는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 1945년 12월 3일에 촬영한 임시정부 주요 인사들 ⓒ위키백과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이동휘는 일본과 미국이 함께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기 때문에 미국에 의해 독립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독립을 위해서는 스스로 힘을 키워 무장 투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동휘는 미국이 우리를 돕지 않으면, 우리를 도울 수 있는 국가는 소련이라고 생각한 소련과 끊임없는 접촉을 시도합니다. 실제로 소련은 우리의 민주정부를 위해 100만 불을 지원해 줍니다. 1920년대 민족주의자 일부가 사회주의자로 돌아선 이유 중 하나는 실질적으로 소련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며, 우리의 파트너가 소련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 대한민국임시정부 항주유적지기념관 ⓒ위키백과

나중에 소련에게 지원받은 지원금은 화근이 됩니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이면서 한인사회당의 간부였던 이동휘가 소련에게 받은 돈을 한인사회당에 가져다 주려 하게 됩니다. 이 사실이 밝혀지자 민족주의의 다른 세력들이 이동휘를 비판하며 받은 돈을 임시정부의 자금으로 사용해야한다고 주장하지만, 사회주의 계열의 김립이라는 인물은 사회주의계열의 독립운동자금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맞서게 됩니다.

나중에 돈을 남용한다는 정보가 새어나오자 김구가 부하를 시켜 김립을 저격하는 일까지 벌어집니다. 이동휘가 임시정부자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다는 오해가 생겨 독립운동가들끼리 죽고 죽이는 비극적인 사건이 임시정부의 흑역사로 남게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계층과 이념, 노선의 차이로 임시정부 내에 끊임없이 분란이 일어났고, 이 일을 계기로 임시정부의 주요인사들이 떠나 임시정부는 유명무실해집니다. 안타깝게도 1920년대 중반부터는 대표성을 갖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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