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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우의 인물채집] 총잡이 양현모! 그가 <양현모 사진관> 주인이다!

칼럼니스트 오치우 승인 2021.01.14 15:26 의견 0
양현모 작가 (칼럼니스트 오치우 제공)

그는 총잡이다.
기관총을 쏘는 총잡이가 아니라 한 발 한 발 장전하며 호흡하듯 격발하는 스나이퍼다. 카메라를 저격용 라이플처럼 껴안고 물기 없는 눈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아니 그냥 보는게 아니라 피사체 하나하나를 정조준 하고 있는 거다. 저격수의 눈빛으로 세상 한가운데를 바라보며 지긋이 관통해온 남자 양현모는 사진 찍는 사람이다.

사진사라는 어감의 가벼움에 비해 그의 셔터는 터무니없이 무겁다. 그는 셔터를 누르지 않는다. 딱 한 발을 위해 그는 방아쇠를 당길 뿐이다. 스나이퍼니까,

격발하는 순간, 명중하는 피사체는 쓰러지는게 아니라 '훅' 날아와 그의 망막 한가운데 환상처럼 열린다. 타겟의 과거와 미래로 통하는 비상구가 비로소 열리는거다. 그때서야 그는 물기 도는 눈동자로 말을 건넨다.

“예뻐요!”

그는 예쁜사람을 좋아한다. 이태리에서 만났던 나오미 캠벨, 스텔라 테넌트는 무조건 예뻤고 서울에서 본 배우 김태희는 이래서 예쁘고, 한예슬은 그래서 예쁘고, 송혜교, 이나영은 이래서 예쁘다고...

길다싶은 순간, 터놓고 말하기 어렵다며 말꼬리를 ‘훅’ 말아 버린다. 긴 침묵, 천성적인 관음증이 그를 ‘사진 찍기의 길’로 이끈 건 아닐까?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뻔뻔하게 눈 똑바로 뜨고 그녀들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카메라를 들고서만 가능했다. 육안으로 솜털이 보일 정도의 근거리에서 예쁜 여자의 얼굴을 볼 수 있는 배짱이 그에겐 애초에 없었기 때문이다.

“어림도 없어요. 멀리서 눈만 마주쳐도...”

수줍은 남자 양현모는 히죽이 웃으며 카메라를 권총처럼 겨눈다.

“카메라 파인더를 통해서라면 아무리 예쁜 여자도 숨소리 느껴질 거리까지 다가가서 담담히, 뻔뻔하게, 노골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었지요. 정말로 예쁜 여자, 멋진 남자들을 맘대로 들여다보는 특권이 내게 있다는게 신났어요. 학교에서 전공한 다큐하고는 아주 다른 만족감이 있었지요.”

“다큐로 학부를 졸업 후 다큐멘터리 작가의 시간은 현장성에 대한 접근이었다면, 이태리에서의 4년은 자연과 자아에 대한 눈을 여는 시간이기도 했어요.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만났던 자연과의 따뜻한 교감을 잊을 수 없어요.”

특히 시칠리아의 풍광을 좋아했던 그는 시칠리아 테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가 이태리에서 만난건 자연만은 아니다. 유학기간 내내 세계적인 패션잡지의 통신원자격을 가졌던 그에게는 세계적인 패션모델들의 체취를 기억할 정도의 자유와 방탕의 경계를 넘나들 기회가 주어졌고 그 또한 그의 감성과 자아를 키우는 계기가 됐으리라.

중앙대학교에서 다큐를 전공하며 학사를 마치고 짧은 언론사 생활을 거쳐 당시, 광고와 패션계의 마이다스로 불리던 사부 구본창(사진작가)을 만났다. 그는 작가 구본창의 어시스트 시절을 “매일 새로운 세상으로 ‘순간이동’을 해야했던 시절”이라고 말했다.

‘순간이동’이 가능 하려면 수시로 ‘유체이탈’을 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 신공을 수련하기 위해 ‘유체이탈’이 아니라 비행기를 타고 이태리로 갔다.

밀라노와 피렌체가 주무대인 그는 보그, 엘르 등의 패션잡지 프레스카드를 가지고 나오미캠벨을 수 없이 찍었고 영화나 광고에서 보던 그들과 함께 시칠리 해변에서 함께 햇볕을 쪼였다. 등짝에 땀 날 때쯤이면 전화벨이 울리고 그는 카메라를 총처럼 움켜잡고 시골 마피아처럼 우쭐하며 달려 나갔다. 그리고 그는 이태리의 사진학교에서 영문 모르는 '수석졸업'도 했다.

97년 귀국, 양현모는 이태리 수행으로 ‘유체이탈’엔 성공 못했지만 ‘카드연체’로부터 이탈하는데 성공했다. 사고 싶은 장비를 살 수 있었고 결재일을 굳이 기억하지 않아도 세월은 잘 흘렀다. 이태리에서 작업했던 패션, 광고사진들이 광고시장의 호황기에 맞물려 사진작가 양현모의 주가를 솟구치게 했다.

“20여 년 동안, 정말 뉴욕에 온 시칠리아 마피아처럼 살았어요. 수십 명의 스텝들이 제 사인을 기다리며 ‘얼음 땡!’ 대기상태였으니까요. 그때는 ‘아! 이런 게 프로의 자존감이구나!’ 생각 했는데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냥 ‘돈의 권력’이었던 거에요.”

그는 수십 명의 스탭을 제자리로 보내고 그가 공부했던 강의장보다 훨씬 넓고 호화로운 스튜디오도 닫았다. 십 년 전이다. 그리고 그가 남들과 다른 세상을 꿈꾸며 배회했던 충무로로 돌아와 젊지만 친구같은 어시스턴트와 단 둘이 단촐한 간판을 걸었다.

<양현모 사진관> 지나는 사람들은 비틀배틀한 계단을 올라야 되는 옛 건물에 붙은 고색창연한 사진관 간판을 보고 혀를 찬다.

“에이, <뉴욕포토> 이래도 쳐다보지 않을 텐데 사진관이 뭐냐? 그럴 거면 옆에 이발소도 하나 같이 차리던가!”

염려처럼 이발소 부업은 안 해도 될듯하다. 십년 전부터 찍어왔던 탑 사진이 천만원대가 훌쩍 넘는 가격에 의미 있는 속도로 팔려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동춘서커스를 1년을 따라 다니며 사진을 찍었어요. 아마도 흑백 느낌의 간절하고 절박한 꿈을 찍었던 것 같아요. 이태리 시절엔 자유와 욕망을 찍었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돈과 여자를 찍었어요. 허긴 여자를 잘 찍으면 확실히 돈을 벌던 시절이었지요.”

그는 ‘예쁜 여자’ 찍기를 좋아했다. 그리고 그냥 ‘예쁜 여자’가 아니라 찍으면 돈이 되는 ‘예쁜 여자’를 찍었다. 그리고 10년 전 어느 날, 예쁜 여자의 수명이 의외로 짧다는 걸 눈치챘다.

“한 천년 쯤 예뻐야 되는데...”

한숨처럼 내뱉는 독백에 절벽처럼 답이 다가왔다.

“탑이 눈앞을 절벽처럼 가로 막았어요. ‘면벽수행’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더라구요. 천 년 동안, 그 긴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치였을까요? 그럼에도 그 자리에 여전히 서 있다면 이유가 있었겠지요. 그 탑들이 말을 걸어오거든요. 참 예뻐요!”

10년 넘게 탑들과의 밀회를 하던 그는 급기야 2017년 11월 뉴욕 맨하탄에서 '한국의 탑' 전시를 시도해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한국의 탑이 참 예쁘다는 걸 증명했다. 많이 팔렸다는 뜻이다.

뭐가 다른가? 탑도 예쁘게 찍어야 그렇게 나온다. 어릴 때 증명사진 찍는 사진관처럼 탑 뒤에 장막을 치고 찍기도 하고 시간대 별로, 또는 계절별로 또는 달뜨는 밤대로 각기 다른 예쁨을 찍어야 한다. 그러자면 참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여자들의 화장품 가방이 학교 때 도시락가방 보다 훨씬 더 큰 것처럼)

그래서 사람들은 그에게 늘 묻는다. “어떤 장비를 써야 좋은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냐?”'고... 그는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던진다. “왜 찍는 거냐고? 사진!”, “어디 쓸 거냐고? 사진!” 어떻게 대답하든 답은 늘 같다. “렌즈보다 자기 눈을 쉼없이 닦아야 한다!”고... 역시 양현모는 보통 사진사가 아니다.

오랫동안 세계챔피언 이었던 권투선수의 말이 떠오른다. “챔피언은 큰 주먹이 만드는 게 아니라 좋은 눈이 만든다!” 양현모는 챔피언의 눈을 가진 사진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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