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덕업상권(1)] 태백 무브노드 - 위기 청소년 자활을 위한 창업 커뮤니티로 출발하다

(대담) 강원도 태백시 <널티> 김신애 대표 (1부)

윤준식 기자 승인 2021.08.30 19:14 | 최종 수정 2021.09.15 10:54 의견 0
강원도 태백시에 위치한 코워킹스페이스 <무브노드> (사진출처= 무브노드 홈페이지)

덕업상권 프로젝트의 첫 번째로 소개하는 인물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코워킹스페이스 <무브노드>를 운영 중인 김신애 대표입니다.

김신애 대표는 최근까지 강원도를 대표하는 로컬크리에이터로 잘 알려져 있는데요. 그가 주목받았는 이유는 소외된 지역인 태백 출신 청년이 서울에서 전문성과 경력을 쌓은 후 돌아와 유턴형 창업을 실행했고, 그 창업 여파로 다른 도시에서 온 청년들이 지역에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게임 개발과 디자인 영역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활용해 저술, 디자인, 커뮤니티 디자인 분야의 일을 해나가는 것은 물론, 점점 <무브노드>를 통해 맺어진 청년 크루와의 인연을 비즈니스 영역으로 확대하게 되었기 때문인데요.

이로 인해 청년창업, 지역 문화예술, 도시재생, 마을 만들기, 청년 커뮤니티, 원도심 활성화 등 매우 다양한 분야의 성공사례로 화제가 집중되며 선진사례로 널리 알려져 왔습니다.

그러나 김신애 대표가 <널티>라는 이름의 회사... 그것도 사회적 경제의 콘셉트로 창업한 이유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위기 청소년의 자활을 통해 사회적 문제 해결을 꿈꿨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혀진 바 없습니다. 그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무브노드(MoveNode)>의 시작은 위기 청소년들이 사회 속에서 새로운 관계를 맺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도록 돕는 장소이자, 그들이 비즈니스를 통해 움직이는 노드(move node)로서 사회의 일원으로 활약할 수 있도록 돕는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저도 이런 내용을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 저는 다른 테마로 사전취재를 하고자 정선을 답사하게 된 게 계기였습니다. 당시 취재여행에 동반한 지인의 소개와 안내로 태백 <니노나>를 방문한 것이 실마리가 되었습니다. 취재여행을 마치고 태백에서 마주친 메이커스페이스와의 색다른 경험을 페이스북에 남겼는데, <시사N라이프> 전문위원인 <청소년문화발전소> 오경옥 소장을 통해 <니노나>와 <널티>가 서로의 창업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놀이 메이커 스페이스 <니노나>를 운영 중인 <안사람랩> 송아영 대표는 과거 사회적 기업가를 육성하는 재단에서 매니저로 활동한 경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재단이 시행했던 2016년 사회적 기업가 육성사업에 김신애 대표가 선정되었고, 송아영 대표가 <널티>의 담당 매니저가 된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습니다.

2017년 12월, 서울살이를 정리한 김신애 대표가 태백으로 이전해 <무브노드>를 설립해 ‘후기 청소년 자립’을 꾀하려했던 이유도 그렇지만, 매니저와 사회적기업가의 관계가 발전하여 송아영 대표가 남편 장호동 공동대표와 함께 아무 연고도 없는 태백에서 <니노나>를 창업하고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서로가 존재하고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누가 먼저다를 떠나 복잡한 듯하지만 굉장히 특수하면서도 이상적인 사례죠? 지역 창업 커뮤니티의 활동상과 가능성을 알리는 덕업상권 프로젝트를 시작면서 이보다 더 좋은 사례가 있을 수 있을까요?

사회적인 덕(德-공공선)을 실현하기 창업해 각자의 창업을 도우며 서로에게 덕(德)을 끼치고, 나아가 청년 창작 커뮤니티 활동을 통해 지역에 새로운 동력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번 취재 프로젝트의 의의를 알리기 좋은 것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좀처럼 시간을 내기 힘든 김신애 대표의 일정에 맞춰 태백 취재를 서둘렀고, 김신애 대표의 활동을 2015년 10월부터 멘토로서 지켜봐 온 오경옥 소장에게 동행을 요청했습니다. 한편, 태백 취재에는 또 다른 인물이 한 명 더 가세했는데요.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가 태백의 도시재생 현장을 소개하고 도시재생 현장에서 활동 중인 목수가 조합원의 수익 창출을 위해 시작한 특이한 수제버거 가게 <포크>를 안내하며 합류했습니다. 이에 이번 인터뷰에는 4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대담 기사는 <시사N라이프>가 시도하는 ‘노브레이크 저널리즘’의 일환으로 대담시 나눈 이야기 순서와 내용 그대로를 살려 기술했습니다. 원활한 독해를 돕기 위한 윤문,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한 삭제 이외에는 편집하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본문 중에는 김신애 대표가 창업하도록 만든 어떤 인물이 등장합니다. 이름을 밝힐 수 없어 ‘그 친구’, ‘이 친구’라고 표현했으며, 일반명사인 ‘친구’와 구분하기 위해 ‘그 친구’, ‘이 친구’라고 따옴표와 함께 표기했습니다.

김신애 대표, 널티, 무브노드와 관련한 언론기사, 콘텐츠는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https://workflowy.com/s/1/pyOEL6VuwuClEbi5


[대담 참여자]
1. 시사N라이프 윤준식 편집장 (이하 ‘윤’)
2. 널티 김신애 대표 (이하 ‘김’)
3. 청소년문화발전소 오경옥 소장 (이하 ‘오’)
4.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이하 ‘이’)


<널티> 김신애 대표 (사진=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윤: 지난해 초겨울이죠? 11월인가? 정선 고한마을에 올 기회가 있었어요. 동행한 분이 <니노나>를 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분이 보드게임 마니아인데 같이 보드게임을 개발한, 보드게임 관련한 인맥이 태백에 있며 “가까운 곳이니 태백에 한 번 가보자”해서 방문한 곳이 <니노나> 였어요. 이야기를 나누던 중 <무브노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이후 오늘 함께 찾아오게 된 청소년문화발전소 오경옥 소장에게 “태백에 갔다 왔어요!”라고 자랑을 하니, 오 소장님이 김신애 대표와 관련된 사연들을 하나씩 이야기해주셨어요. 최근 오경옥 소장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다 우연히 김신애 대표 이야기가 나온 거예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은 취재가 있었지만, <무브노드> 이야기나 김신애 대표에 대해 아직 덜 알려져 있다, 특히 김신애 대표의 창업 동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김: 맞아요.

◆윤: 중요한 것은 김신애 대표님의 소셜 미션인데, 어쩌다 보니 지역 사회 및 시대가 설정해준 소셜 미션 위주의 이야기만 하다 보니, ‘김신애 대표님의 진짜 이야기는 덜 나타난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늘 저의 목적은 2가지입니다. “김신애 대표님이 왜 <널티>를 창업했는가?”, “회사 이름은 <널티>인데 <막장 책방>, <무브노드>로 가고 있는데, 왜 서울에 있는 매체들은 <무브노드>로만 알고 있는가?”에 대해 그간 덜 알려진 것들을 풀고, 제가 알고 싶었던 지역 창업 커뮤니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소셜 미션 얘기로 시작하다 보면 나올 것 같아요.

▲김: 알겠습니다.


(사진출처= 픽사베이)

◎ 게임개발 과정에서 바라보게 된 위기 청소년

◆윤: 청소년에 대한 소셜 미션을 품게 된 건 언제부터였는지?

▲김: 2015년 5월인 것 같아요. 제가 2016년 3월에 창업했으니 2015년 5월인 것 같아요.

◆윤: 어떤 계기로 청소년과 청년에 대한 생각을 품게 되신 거예요?

▲김: 제가 기술을 쌓고,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올라갔잖아요? 게임 개발이나 그래픽 관련한 기술들을 습득하며 보니, 엄청난 공허함만 남는 거예요. 이후 게임 회사를 그만두고 문화 예술 단체에 들어가게 됐는데, 가지고 있는 기술을 가지고 게임을 문화적으로 풀어내는 활동을 했어요.

당시 얕은 생각으로 “나만의 게임을 만들어 보면 어떨까? 게임을 제작하는데 이야기가 조금 더 자극적이었으면 좋겠다. 조금 더 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나 봐요. 당시 대상을 찾다 보니 ‘위기 청소년’이란 단어가 눈에 띄었고 그 친구들한테 “나의 이야기로 게임을 만드는 행위를 해보자”는 기획이 나온 거예요. “청소년들은 게임을 좋아하니 이런 점이 좋은 툴로 쓰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친구들을 만나보기 시작한 거예요.

◆윤: ‘메타버스’와 같은 세계관을 이미 그때?

▲김: 그렇죠. 그런 느낌인 거죠.

◆윤: 이미 게임 때문에 ‘메타버스’는 시작이 돼 있었으니까요.

▲김: 실제로 아이들이 한글로 코딩할 수 있는 게임 엔진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 게임 엔진을 사용해서 워크숍을 기획하고 아이들을 만났는데 생각보다 대상에 대한 이해도가 없어서 조금 벅차더라고요. 그때 거기서 만났던 ‘한 친구’를 보고 사람을 보게 된 거죠.

그전에는 기술만 보다가 ‘사람을 이렇게 바라볼 수 있구나’라는 마음을 느껴서 ‘청소년들에게 뭔가 해줄 수 있는 존재가 되면 좋지 않을까?’ 처음에 시작한 마음은 이거였던 것 같아요. 되게 얕은 생각으로...

◆윤: 위기 청소년을 인식하게 된 점이 게임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니까 게임에 적합한 소재를 발굴하다가?

▲김: 그렇죠. 이끌릴 수밖에 없던 이유가 저도 어렸을 때 위기 청소년이었다고 생각해요. 범죄를 저질렀다거나 누군가를 폭행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고, 집안이 좀 불우해서 항상 불안했고, 우울했고, 그랬었거든요.

◆윤: 혹시 집안이 좀 불안했다는 말씀은 태백과 정선 지역이 탄광촌이었다가 쇠퇴했잖아요... 그런 점과 관련이 있을까요?

▲김: 돌아보니 그런 점과 관련이 있었어요.

◆윤: 지역 경제가 쇠퇴하니 가정에도 어려움이 있었던 건가요?

▲김: 아버지 직업이 광부였어요. 광부라는 직업이 막장에도 들어가셨을 것 아니에요? 아무래도 막장이란 공간이 굉장히 위험하다보니...

◆윤: 심리적 불안감? 일종의...?

▲김: 공포감이 있었던 거죠.

◆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게...?

▲김: 항상 죽음과 맞닿아 있으니까 불안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 데서 오는 분노를 집에서 표출한 거예요. 그런 것들이 제 삶에 응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저 역시 위기 청소년이라고 느꼈던 부분이에요. 어찌 보면 ‘그 친구’한테 맞닿을 수밖에 없었던 연결고리가 아니었을까?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이것도 돌아와서 알게 된 사실이랄까요?

◆윤: 그런 마음이 서울에서 게임 개발과 위기 청소년들과 만남을 통해 “우연히 자각하게 됐다”고 볼 수 있는 거네요? 나의 문제, 나의 문제이기도 했다?

▲김: 어른들이 지켜주지 않은 존재들을 보면서 “나랑 비슷한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원래 외부 세계, 그러니까 기술 및 돈을 버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가 ‘그 친구’를 통해 저를 보게 된 거죠.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윤: 처음부터 다시 돌아올 생각을 한 건 아니고, 서울에서 시작해보려 하신 거네요. 그때가 2015년이라는 거죠? 그러면 다시 태백으로 오신 건 연도로는 언제였죠?

▲김: 2017년 6월부터 왔다 갔다 했어요.

◆윤: 태백에 오기 전, 2년간 활동하며 뭔가 준비를 하신 거네요? 그 2년간의 이야기를 좀 더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 위기 청소년 문제 솔루션은 ‘사회적 경제’와 ‘창업’이 아닐까?

▲김: 그 친구를 만나고 제가 “어떻게 ‘이 친구’와 앞으로 게임을 만들면서 돈을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 옆에서 지켜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그 당시 “어떻게 하면 ‘이 친구’를 지켜주면서 먹고 살 수 있을까?”에 대한 결론은 결국 ‘사회적 경제’였던 거예요.

지금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결론인 거죠. 제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이 친구’랑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만 있으면 되는 거였는데... “어떤 걸 가져다 박아야 이걸 지켜줄 수 있겠구나” 이렇게 생각했던 거예요. 결론적으론 창업했어요.

◆윤: 서울에서?

▲김: 사회적 기업가 육성 사업으로 창업을 하는 과정 가운데, ‘그 친구’가 제 곁에 계속 있었던 게 아니라 소년원에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어요. ‘이 친구’가 소년원에서 나와 바로 뭔가 할 수 있도록, 타이밍을 계속 기다렸죠.

그랬는데 이런 상황들이 반복되면서 저도 조금씩 상실감이 드는 거예요. “이게 가능한 일인가? 나의 선택을 ‘이 친구’한테 강요하는 건 아닌가?”, “‘이 친구’는 변하지 않는데 내가 이상한 걸 믿고 있는 건 아니야?”하는 생각이 2년간 지속했던 것 같아요.

‘이 친구’를 비슷한 상황에 부딪친 친구들을 수용하는 학교에 보내면서 수업도 같이 다녔는데 좀처럼 안 나아지더라고요. 마지막에 (소년원에) 들어가는 걸 보고 “안 되는 거구나...” 그래서 서울에서는 안 되는 걸 수도 있겠다.

◆윤: 대도시가 갖고 있는 환경 문제가???

▲김: 네. 이 도시에는 저밖에 없는 거예요.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이 친구의 삶을 혼자 다 감당하기에는 제가 많이 부족했던 거죠. 더 좋은 어른들이 주변에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창업을 시작한 계기를 설명하는 김신애 대표 (사진=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윤: 사실 대도시가 생활에 필요한 비용도 많이 들고, 지역 사회는 어두운 곳이 있다 해도 커뮤니티가 좁으니 (비행이) 드러나잖아요.

▲김: 맞아요. 비슷한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 보살피는 게 너무 고단한 거예요. “나보다 좋은 사람들을 보면 얘가 괜찮아지지 않을까?”하는 고민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때 답이 없었고 “틀렸구나”라고 생각하며 조금 우울했던 것 같아요.

감정이 격해지며 눈시울이 붉어짐.
잠깐 감정을 진정시키고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시간이 흘러감.

◆윤: 그건 김신애 대표님이 잘못한 게 아니에요.

▲김: “제가 믿었던 것이 틀렸구나”를 바라보는 게 힘들었던 것 같아요.

◆윤: 저는 말씀하시는 김신애 대표님의 진정성을 보면서, 틀린 게 아니라 뭐랄까요... 사회가 그만큼 미숙하다? 당시 2015년이었잖아요. 당시 김신애 대표님도 비즈니스가 지금만큼 능숙하진 않으셨을 거예요. 비즈니스가 성숙해야 소셜 미션도 그만큼 실현할 수 있으니까요.

▲김: 맞아요.

◆윤: 대표님이 잘못한 게 아닌 거예요.

▲김: 제가 사회적 기업과 육성 사업했을 때 ‘위기 청소년들의 이야기로 게임을 만들겠다.’ 이게 끝이었어요. 근데 그 면접 보셨던 그분이 그 사업 계획서를 보면 “이걸 왜 뽑아줬지?”

◆윤: 눈이 멀었던 거군요, 심사하시는 분이?

▲김: 그러니까요. “이걸 왜 뽑아줬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돈을 벌 수 없는 구조인데 뽑아줬던 것 같아요.

□이: 사람에 대한 얘기를 했으니까요.

▲김: 그랬던 것 같아요.

◇오: 그 페이퍼에 진정성이 되게 많았거든.

▲김: 아직도 가끔 연락을 주고 받곤 해요. 그리고 사업에 선정된 뒤에 만났던 사업 멘토로 만나게 된 분이 송아영 님이세요.

태백시 장성동 전통시장 골목에 위치한 놀이 메이커스페이스 <니노나> (사진=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윤: 그럼 그때 창업하셨을 때도 업체명이 <널티>였던 거예요?

▲김: 네. <널티>!

◆윤: <널티>는 무슨 뜻인 거예요?

▲김: 게임 회사에서 나오는 얘기 중 “N자로 시작하면 대박 난다”는 얘기가 있어요. <네이버>, <넷마블>, <넥슨>과 같이 “N으로 시작 해야겠다”가 첫 번째 규칙이었고. ‘널 값’은 아무것도 안 들어가는 값이거든요?

◆윤: 아, 영어 ‘null’의 ‘널’이었어요?

▲김: 그런 값을 넣어 “좋은 것들을 만들어보자”는 뜻으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윤: 이 이야기 속에서 전혀 상관없는 거지만 상도동의 블랭크가 만든 <공집합>도 “아무것도 없다” 즉, 공간이 비어있는 걸 표현을 하려고 그렇게 했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널티>의 ‘널’은?

▲김: 저의 경우는 ‘사람’!

◆윤: 그럼 ‘티’는 뭔가요?

▲김: ‘티(tea)’는 우려내는 건데...

◆윤: 차?(tea) 한글이 아니라 다 영어였어요?

▲김: 영어예요. <무브노드(Move Node>도 영어.

◇오: 김신애 대표 닉네임이 ‘티백’이에요. ‘티백 작가’

◆윤: 티백도... 그러면 차 우려내는 티백(teabag)?

▲김: 예전에 <디자인 티>라는 블로그를 9년 정도 운영했는데... 디자인을 우리다 이런 느낌으로 작업을 죽 하면서 만들어진 브랜드가 있었어요. 디자인을 우리는 사람이 저라 티백이라는 닉네임을 사용했었습니다.

◆윤: 태백을 떠나 돌아온 텀(term)이 어떻게 되나요?

▲김: 14년 정도?

◆윤: 14년 떠나 있다가 돌아온 거예요?

▲김: 34살에 돌아왔어요.

◆윤: 어느 도시를 돌아보고 오신 거예요?

▲김: 대학교는 목포대를 다녔어요. 태백에서 제일 먼 곳으로 갔죠.

◆윤: 왜 목포까지...?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서?

▲김: 집에 오기 싫어서요. 멀리 가야 못 오니까!

◆윤: 당시에는 목포에서 여기 오려면 교통편이... 돌고 돌아올 수밖에 없잖아요?

▲김: 기차를 2번 갈아타야 돼요.

◆윤: 목포에서 서울로 가서, 서울에서 다시 태백으로 와야 되는 거잖아요.

▲김: 그렇죠. 이후 목포에 갔다가... 안산, 동해를 거쳐 서울에 좀 오래 살았어요.

◆윤: 경험한 도시가 다섯 군데. 태백, 목포, 안산, 동해, 서울... 서울은 어디에 계셨어요?

▲김: 서울은 신대방에도 살았었고, 신림, 구로에서 살았었어요.

윤: 동작구, 구로구, 관악구. 인접해 있는 3개 구를 다니셨네요?

▲김: 거기가 쌌어요. 그리고 양천...

◇오: 양천에는 사무실 있었잖아?

◆윤: 오경옥 소장님이 더 잘 아시는 것 같아요.

▲김: 맞아요. 거기에 게임 개발하는 학교가 있어서 그 근처에서도 좀 살았었고.

◆윤: 기초 지방자치단체 기준으로 놓고 보면 일곱 군데네요. 거쳐 온 곳들이, 화려한 곳보다 약간 쇠퇴했거나 허름한 느낌 나는 곳들을 거치신 것 같아서...

▲김: 그렇죠. 중심가엔 있진 않았던 것 같아요.

◆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계층을 대변해주고 계신다는 느낌이 들고요. “재생의 희망을 내가 주겠다” 잔 다르크 같은 느낌도 들고요. 서울에서 사회적 경제 실험을 2년간 해보다가 “태백으로 와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계기가 있을 것 같아요.

▲김: 그거 실패했다고 느끼고 거의 한 달간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었어요. 집에서 안 나왔어요.

◆윤: 그 시기에 ‘그 친구’가 다시 소년원에 들어가 있었던 거군요?

<청소년문화발전소> 오경옥 소장과 <널티> 김신애 대표. (사진=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김: 네, 못 만났어요. 그때 오경옥 소장님이 “이런 게 있는 한번 가볼래?”하고 ‘제주 한 달 살이’ 관련 자료를 보내주셨어요. 그걸 보자마자 “그냥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 꾸려서 갔어요. 원래 그림을 그리러 갔는데 며칠 동안은 5~6시간씩 걷기 시작했어요. 버스 타고...

◆윤: 운전면허도 없으시니.

▲김: 그게 한몫한 거죠. 내륙에서 내려서 바다까지 걸어가는 걸 계속했거든요. 그림 그리는 도구를 다 가져갔는데 그림은 안 그리고 그냥 걷기만 하고 돌아왔었는데 그게 엄청난 인사이트를 주는 거예요.

걷다가 “와, 흙냄새가 이렇게 심하게 난다고?”, “와, 새소리가 이렇게 귀에 때려 박을 정도로 크게 났었어?”, “색깔이 이렇게 선명하네?” 감각에 집중하게 된 시기를 가진 거예요. 5시간 걸으니까 발에 물집이 터져 너무 아픈데도 그게 너무 좋은 거예요.

◆윤: 당시에 매우 힘드셨군요. 말씀은 ‘물집 터진 게 그렇게 좋았다’라고 하셨지만 사실 그만큼 힘들어서 그런 걸 좋게 느끼셨던 것 같아요.

▲김: 내가 살아있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서울에서 어떻게 살았었냐면 저녁 먹기 귀찮아서 퇴근하면서 가는 길에 있는 음식점에 들어가 매일 같은 음식을 먹었어요. 그냥 생존하기 위해 먹는 행위랄까?

◆윤: 저도 공감이 됩니다. 저도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돈이 들어오면 저 자신에게 편의점 상품권 10만 원 어치를 선물 했어요. 점심때 CU에서 ‘한판도시락’을 사 먹고, 집에 와서 저녁때는 3분 짜장, 3분 카레 순한 맛, 매운맛, 이 3개를 번갈아 가면서 먹었던 거죠, 매일매일... 저도 그래서 공감이 돼요. 당시 저는 슬프다기보다 제 자신이 되게 한심하게 여겨졌어요. “어쩌다가 인생을 이렇게 살고 있지?”

▲김: 저도 비슷한 느낌이었어요. 나 자신을 돌보지 않았구나. 그래서 그때 살아있다는 걸 처음 느꼈던 거 같아요. “내가 살아있는 존재였구나”, “나는 왜 이렇게 살게 했지?” 이런 게 슬펐어요. “왜 이걸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지?” 이런 게...

(사진출처= 픽사베이)

◆윤: 아무도 해본 적이 없으니까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당시 사회적 기업 육성하시는 분들이 선생님들이지, 사업가가 아니었어요. 자기가 장사를 안 해보고, 사업을 안 해보고, 사람을 안 써보고 그러니, 어떻게 창업하고, 어떻게 서류 처리해야 하는지 매뉴얼에 있는 거로만 얘기 하지...

막상 그거 가지고 세무서에 갔는데 “이거 안 되는데요” 그러면, “왜 안된다 그래요? 매뉴얼엔 이렇게 있는데”라고 얘기가 돌아오거든요. 그리고 사람을 쓰는 일도, 사람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기에 감정과 생각이 있기에 또 다르잖아요? 그런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죠.

▲김: 맞아요.

◆윤: 김신애 대표가 개척자였으니까!


도시재생이 이루어지고 있는 장성동 골목. (사진= <오롯컴퍼니> 이종건 대표)

◎ ‘제주 한 달 살기’로 재발견한 태백

▲김: 그래서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여기는 사람을 매몰되게 만드는 곳이구나” 내가 살만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고 “어디로 가지?” 하면서 다음 가야 할 장소를 찾았어요.

한 달 살이 할 다른 공간도 찾아보았는데 제주밖에 없더라고요. “그럼 내가 한 번 만들어볼까? 나 같은 사람이 있을 거니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찾다 보니 다른 데 가긴 무섭고, 제가 제일 잘 아는 곳은 고향인 태백이잖아요. “그럼, 여기서 한 번 해볼까?” 했던 시기가 5~6월쯤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운 좋게도 그때 태백에서 폐공간 지원 사업 같은 것들이 뜨기 시작한 거예요. 타이밍 엄청 끝내주게...!

◇오: 맞아. 너무 잘 맞았어!!

▲김: 폐공간 지원 사업을 준비하던 중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를 만나게 된 거죠. 제가 그때는 낯도 엄청 가리고, 말도 잘 못 하고 그랬어요. 그림 그리는 작업을 많이 했는데 혼자 작업하는 걸 많이 하다 보니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지 못한 상태였어요. 사업 피칭할 때 넘어지고 이랬어요.

◆윤: 과도하게 긴장해서?

▲김: 그러니까요. 제가 느끼기에는 안 뽑힐 사람이 뽑힌 거예요. 머리는 노랗게 하고 와서 말도 잘 못 하지, 발표하러 올라와서 넘어지고....

아직도 당시 심사위원이셨던 <감자꽃 스튜디오> 이선철 대표님이 그 얘기를 되게 많이 해주시는데. 당시 엄청 특이했다고, 사업하기에는 낯도 많이 가리고 어설펐지만, 진심으로 느껴져서 뽑아주신 거라고...

◆윤: 다들 불안했을 거거든요. “저 사람 사업을 잘 할 수 있을까?”

▲김: 운이 좋았죠, 진짜! 진짜 운이 좋았어요! 첫회 사업이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이렇게 된 것 같아요.

◆윤: 일단 폐공간이어야 되는 거죠?

▲김: 그리고 유휴공간이어야 하고... 코워킹 스페이스니 공간도 커야 되잖아요? 가격도 맞아야 되지, 입지도 적당해야 하는데... 여기가 엄청 구석이거든요, 태백에서도... 그래서 오시는 분들이 “왜 여기다가 이런 걸 냈어?” 막 이런 질문 진짜 많이 하세요. 그때는 좀 두려웠죠. 왜냐하면 태백에서도 황지가 시내인데, 장성 구석으로 선택하는 게 너무 무서웠던 거에요.

◆윤: 여기서 말씀한 구석이란 의미가 아니라 태백에서도 구석이다. 이 말씀이셨던 거군요?

▲김: 그럼요. 엄청 구석이에요. 근데 진짜 좋은 선택이었어요. 오시는 분들이 다 이렇게 생각하세요.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오시고...

◆윤: 그래서 <무브노드>가 그렇게 시작이 된 거고... 그런데 여기 2층은 어떻게 해서 그냥 텅 비어있었던 거에요?

▲김: 여기 근처에 기계공고가 있어요. 특성화 고등학교여서 지역 사람들보다 외부에서 많이 입학해요. 일부는 기숙사에서도 살고, 근처에 집을 구해서 사는데 당시 학생들이 여기 2층에 살았어요.

◆윤: 위층에 하숙이나 자취방 같은 게 있었던 거예요?

▲김: 거기 살던 친구들이 맨날 술 먹고 옷 벗고 돌아다니고, 막 소리 지르며 달려가고 이랬대요. 그래서 그 친구들을 내보내고 거기가 유휴 공간이 되었던 건데... 저희가 계 탄 거죠!

◆윤: 이게 아까 이야기한 폐공간이면서 유휴 공간이어야 되는데 그 조건이 딱 맞아떨어지는 공간이었던 거군요?

▲김: 진짜 타이밍 좋았어요. 엄청.

◆윤: 근데 전해 듣기로는 이 공간을 조성하는데 돈이 없어서 펀딩도 하셨다고 들었어요.

▲김: 2017년도 10월부터 이곳에 계속 왔다 갔다 했어요. 저희가 4월에 오픈했으니... 제가 5개월 정도 일을 하나도 못 한 거예요. 그러니까 벌어놓은 돈 다 까먹고 “이거 큰일 나겠는데?” 할 때 <비플러스>에서 펀딩을 통해 해결하게 됐어요.

▷관련 자료: 청년들이 모여 놀며 일하는 공간
(주)널티의 강원도 태백 무브노드 공간조성 - 비플러스 펀딩

https://benefitplus.kr/campaigns/73

◆윤: 그동안 그림 그리는 일만 하셨지, 집수리나 인테리어를 해본 경험은 없으니까...

▲김: 그렇죠. 그 경험이 정말 좋았던 거 같이 진행했던 그분이 작업할 때 제가 계속 이렇게 뒤에 봤거든요. 계속 여기에 내려왔었어요. 단지 맡겨놓고 끝이 아니라... 그게 저에게 좋은 도움이 됐었던 것 같아요. “이렇게 작업하는구나”하는 것들을 좀 배웠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그런 점이 정말 좋았어요.

◆윤: <무브노드>를 만드는 데 다섯 달이 소요된 거네요? 처음에 오픈한다고 해서 사람이 오거나 코워킹스페이스면 어떤 면에서는 일이든 아니면 월정액이든 해서 회원 수입이 들어가야 하잖아요. 그래야지 운영이 되는 거잖아요? 안 그러면 혼자 쓰는 대형 사무실이 돼버리니까.


<무브노드> 실내 (사진출처= 무브노드 홈페이지)

◎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의 지원과 <무브노드>의 성공

▲김: 지금은 코워킹스페이스라고 얘기하고 있지만, 처음에는 제가 작업실을 내는데 “사람들이 와서 작업을 같이했으면 좋겠다” 이 정도의 감정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너무 일이 커진 거죠. 처음에 저희가 오픈식 할 때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에서 한 80명 정도를 모아주셨어요.

◆윤: 어마어마한 인원인데요? 관광버스 두 대 인원이잖아요?45인승.

▲김: 그렇죠. 그래서 옥상과 2층에 사람들이 막 북적거리고, 행사를 치르고... 그러고 나서 그 해만 <무브노드>에 한 2~3천 명이 왔어요. 진짜 많이 왔어요.

◆윤: 관광지가 됐네요? 코워킹스페이스 개념이 아닌 데요? 2~3천 명은?

▲김: 그런데 그 사람들이 돈을 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냥 와서 보시는 분들이었거든요.

◆윤: 선진지 견학으로 오신 거군요?

▲김: 이런 분들이 사용자가 아녀서 저희가 돈을 안 받았어요. 그해에 어떻게 먹고 살았냐면 그렇게 “사람들이 와서 북적대는 곳이다”라며 저희에게 일을 주는 팀이 많았던 거예요. 2년 동안은 사람들 맞이하랴, 일도 하면서 지냈어요.

◆윤: 2017년 후반기부터 2019년도까지...?

▲김: 정신없이 살았어요.

◆윤: 그런데 실질적인 코워킹스페이스 자체 매출 수익이 아니라 디자인 용역 수익으로 유지하신 거잖아요?

▲김: 디자인이랑 커뮤니티 디자인 수익으로 살았죠.

◆윤: 의도한 거랑 다른 일로 수익이 발생하는 게 돼버렸네요. 그러면서 <무브노드>에 와서 일하는 크루들이 생기긴 생겼네요.

▲김: 지금은 한 10분 정도... 지금 <니노나>팀 포함해서 한 5~6명 (태백에) 내려와 있고요. (태백으로) 이주하려고 하는 분들도 한 4명 정도 계세요.

◆윤: 제가 처음 말씀드렸던 것처럼 지역 창업 커뮤니티가 형성된 것 맞네요.

▲김: 창업 커뮤니티보다 창작 커뮤니티가 더 맞는 것 같아요. 왜냐면 창업이라고 하면 돈을 버는 기술에 대한 다음 단계를 조밀하게 가져가야 할 텐데...

◆윤: 좀 더 기계적으로 얘기를 하면 사업자등록을 얘기하는 거죠. 사업자등록이나 법인 설립이 되는 일이라면 창업이라 명확히 구분을 지을 수 있는데, 창작자들은 사업자등록과는 상관없이 작품 활동이 본인 일인 거라서요.

▲김: 함께 앉아서 얘기하는 것들을 보면 본인의 생각에 대한 표현들이 많아요.

◆윤: <무브노드>를 중심으로 형성된 커뮤니티 중에서 메이커스페이스 <니노나> 같은 경우는 넓은 의미의 사례죠. <니노나>는 보드게임이나 빅게임을 만들잖아요? 보통 메이커스페이스라 하면 3D 프린터로 완성할 공산품의 시제품을 만들거나 하는데, <니노나>는 같은 3D 프린터를 갖고 제작하는 게 게임 캐릭터, 말판, 주사위란 말이에요.

“그게 뭐 대단한 해?”라고 하지만 해커톤하듯이 하룻밤 사이에 게임, 보드게임을 여러 개 만들어 테스트해 봄으로써 새로운 창작물이 나올 수 있게 한다는 건데... 이런 식으로 창작 커뮤니티라는 말을 넓은 의미로 해석해보면 창업 커뮤니티를 형성하는 거고...

또 <니노나> 하나만 포커싱하면, 보드게임으로 네트워킹이 되니 서울이나 태백에 와서 보드게임을 통해 뭔가 해보는, 또 다른 형태의 확장된 창업 커뮤니티를 가진 거고요... 그렇게 해서 태백에 내려와서 창작 활동을 하고 계시는 분 다섯 팀 정도 된다?

▲김: 한 열 명 정도? 믿고 같이 일할 수 있는 친구들이...

◆윤: 그러면 김신애 대표님과 김신애 대표님 쪽으로 오는 일들을 또 나눠서 진행하나요?

▲김: 엄청 나눠서 하죠.

◆윤: 협업까지 되는 거네요?


(사진출처= 픽사베이)

◎ 지역 창작 커뮤니티의 형성과 협업

▲김: 처음 저희가 어떻게 일을 했냐면 예를 들어, 일이 들어오면 이 친구가 여기서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데 1년 정도 걸리더라고요. 즉, 계속해서 일해 주는 환경적인 기반이요. 그런데 일을 할 때 돈을 정기적으로 받으면 나태해지거나 게을러지거나 아니면 그냥 돈이 들어오니 놀거나 이럴 수 있잖아요? 근데 모두 열심히 해줬어요. 그런 친구들이 태백으로 다시 내려와요.

그 다음 단계는... 저희가 그 일을 끊어요. 그 사람이 거기서 먹고 살 수 있게 하거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해”라고 해서 프로젝트 성격으로 일을 줍니다. 지금도 이렇게 작업을 하고 있어요.

◆윤: 일을 끊는다는 게 일감을 안 줘서 말려 죽인다는 의미가 아니라...

▲김: 이 친구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프로젝트 성격으로 돈을 지불해요. 그럼 이 친구가 자기가 여기서 할 수 있는 범위의 일들을 만들어가면서 저희와 협업할 수 있는 건강한 구조를 알게 된 거죠.

◆윤: 그렇게 해서 태백 한 달 살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감을 줘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까지 도와주시는 거잖아요.

▲김: 실제로 일을 해봐야 지역을 잘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살기만 하면 좋죠. 근데 일을 해보고 주민들과 만나보면서 여기에서 구매하는 것, 일을 진행해보다 생기는 불편함이 있잖아요. 그걸 견딜 수 있는 존재만 태백에 내려올 수 있는 거 같아요. 서울에서의 편리함만 생각하고 내려오면 일을 못 하는 것 같아요.

◆윤: 현재 주로 하시는 일이 디자인 관련된 거, 커뮤니티와 관련된 일을 한다고 말씀하셨던 일의 발주처들이... 어느 지역, 어디에서 들어오는 건가요? 일단 가까운 태백시의 일감부터 받을 거 같긴 하거든요.

▲김: 제일 많았던 건 사실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일인데, <무브노드>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어요. 저희가 서울에서 우리와 같은 일을 하는 팀보다 퀄리티가 조금 떨어질 거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그런데 그걸 다 기다려줬어요. 초반 퀄리티 떨어지는 걸 계속 기다려주고 성장할 수 있는 일을 계속 줘서 저희도 그 일을 해내면서 성장한 게 있어요.

그 다음에 태백시에서 일을 주셨는데 좀 안 맞아요. 강원랜드 쪽 일도 있었고, 그리고 지금은 정선군 고한, 사북 쪽 일도 하고, 영월 쪽 일도 하고 그러니까 강원 남부로 약간씩 이렇게 퍼지고 있어요. 일하는 방식이.

◆윤: 강원 남부라고 해봤자 시장성과 인구 구조상 일이 그렇게 많을 거 같진 않아요.

▲김: 그런데 일이 정말 많아요. 저희가 2019년도에 매달 프로젝트 두 개씩 했어요. 죽어나는 줄 알았어요, 진짜! 그런데 코로나19가 터지고 나서 딱 멈췄잖아요. 그래서 좀 살았던 것 같아요. 태백에서 서울에 있을 때처럼 일했어요. 코로나19를 겪고 올해는 밸런스 조절하면서 가고 있는 거죠. “이렇게 해서는 안 되지”라고 생각하면서.

◆윤: 삶과 일의 밸런스를 맞추는, 워라벨 맞추는 게 ‘올해부터 어느 정도 요령이 생겼다.’ 이렇게 볼 수 있겠네요? 그럼 <무브노드> 생태계라고 표현해야 될까요? 함께 일하는 많은 창작자 집단들도 마찬가지로 그런 일을 겪었던 건지...

▲김: 저와 협업을 가장 많이 했던 친구가 일을 진짜 많이 했어요, 2019년도까지. 그리고 그다음에 매우 아팠어요. 그 친구를 보면서 “이렇게 가면 사람들이 다치는구나”라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그렇게 일하지 말아야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지금은 그 친구도 그렇게 일을 안 하고 있어요.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는데 계기가 됐다고 할까요?

◆윤: 지역 창업 커뮤니티 얘기까지 나왔는데요. 다시 처음 드렸던 질문으로 가봐야 할 거 같아요. 소셜 미션에 대한 생각을 잊으신 건 아닌 것 같거든요? 청소년의 삶, 위기 청소년에 대한 것, 눈물을 흘리시면서 회상하시는 걸 보니 계속 마음 속에 묻어 두면서 그 생각을 더 다져가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표정을 보니 그래서요. “어떻게 더 발전되고 있는 걸까?” 이런 질문 드려도 될지...

▲김: 청소년이란 존재에 대해서는 아직도 계속 마음에 쓰이는 거 같긴 해요. “진짜로 청소년인가?”에 관해 물어보면 그러진 않은 거 같아요. 왜냐면 ‘그 친구’를 제외하고 나서 그렇게까지 마음을 준 사람은 없었거든요. 어떻게 보면 “이 친구들이 건강하게 자라나는 것들은 좋아. 하지만 내 삶을 막 바쳐서까지 하고 싶지는 않아”라는 것 같아요, 일단은! 근데 그걸 이렇게 생각해보면 “내가 공감을 했었던 건 소수자가 아니었을까?” 보통 소수자라 하면 ‘성 소수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데, 제가 얘기하는 건 일반화에서 떨어져 나간 소수자들...

◆윤: 변방에 있는 사람들?

▲김: 공감 받지 못한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우리 공간에 오시는 분들, 같이 일하는 사람들도 주류보다는 B급이 많고, 독특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오시고, 왔을 때 얘기할 때 공감 받지 못한 것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내 삶이 이렇게 됐다”는 걸 보면서 ‘그 위기 청소년 친구’도 어찌 보면 소수자의 일환이고, 저희가 같이 가고 있는 친구들도 소수자 일환이고, 저 또한 그런 거 같아요.

왜냐하면 서울에서 자리 잡고 있었어요. 집도 넓혀가기 시작했고, 돈도 안정되게 벌기 시작했는데 그걸 다 내려놓고 내려왔던 것도 그렇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한테 공감해주고 싶은 게 <무브노드>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런 사람들이 만나면서 그 외에 더 많은 소수자가 궁금해지고, 다른 점들을 이해해주고, “이렇게 살아가면 좋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온 것 같아요.

(2부에서 계속)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