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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브리그] 레전드 최동원, 만화 같았던 한국시리즈 4승의 추억

칼럼니스트 지후니74 승인 2020.04.06 14:00 의견 0

프로야구 레전드를 추억하는 시간, 오늘의 주인공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간 투수 최동원이다. 최동원은 야구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아는 레전드 중 레전드였다. 고교시절부터 특급 투수로 자리했던 대학, 실업야구 시절에도 최고의 자리를 지켰다. 국제경기에서도 그는 에이스였다. 이는 그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관심을 이끌어냈다. 물론, 병역의 문제와 해외 진출에 대한 체계적인 뒷받침과 시스템이 없었던 시절 현실화되지 못했지만, 그만큼 그의 실력은 뛰어났다.

이런 명성은 프로야구에서도 이어졌다. 비록, 전성기를 지난 시점에 프로에 데뷔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탓에 그의 전성기는 길지 않았다. 평범하지 않은 그의 행보 역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프로야구라 하지만, 구단이 절대 갑의 위치였던 시절, 최동원은 연봉 협상 등에서 구단과 대립각을 세우며 뉴스 메이커가 되기도 했다. 그 과저에서 비난 여론이 그에게 향하기도 했지만, 그는 최고 선수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 했다. 이 때문에 그의 소속 구단이었던 롯데와 최동원은 연봉 협상에서 치열한 줄다리기를 해야 했다.

이런 배경에는 그의 성적이 뒷받침되었기에 가능했다. 최동원은 프로 데뷔 연도는 1983년 적응에 문제를 보이며 9승 16패를 기록하며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당시 롯데의 전력은 하위권이었다. 최동원은 2.89의 방어율과 함께 208.2이닝을 책임졌다. 내용에 비해 결과가 좋지 않았다.

故 최동원 선수 (사진출처: 나무위키)

1984 시즌은 그가 레전드로 자리하게 하는 결정적 시기였다. 그 해 최동원은 무려 284.2이닝을 투구했다. 지금보다 경기 수가 크게 적었고 전기와 후기리그로 나뉘어 있던 리그 상황을 고려하면 그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최동원은 27승 13패, 6세이브 방어율 2.40을 기록했다. 탈삼진 223개는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리그 최다 기록이었다. 그만큼 그의 투구는 압도적이었다.

이런 최동원을 앞세워 롯데는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시리즈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과정에는 논란이 있었다. 1984 시즌 가자 강력한 우승 후보는 삼성이었다. 당시 삼성은 이만수, 장효조로 대표되는 최강 타선이 있었고 제일 동포 김일융에 아마 시절부터 정상급 투수였던 김시진이라는 원투 펀치를 보유하고 있었다. 다른 선수들의 면면도 화려했고 모 그룹의 지원도 타 팀을 압도했다. 강한 선수층과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삼성은 최강팀의 면모를 과시하며 여유 있게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삼성은 후기리그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여유 있는 리그 운영을 했다. 후기 리그 막바지 삼성은 프로야구 역사에 남을 선택을 한다. 당시 후기리그는 롯데와 지금 두산의 전신 OB의 선두 경쟁이 치열했고 시즌 마지막 2경기까지 이어졌다. 롯데는 마지막 2연전을 삼성과 치러야 했다. 롯데는 자력 우승을 위해 삼성과의 2연전 승리가 절실했다. 삼성은 1982년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아픈 패배를 그들에게 안겨주었던 OB의 감독이었던 김영덕 감독을 영입하며 우승의 의지를 다졌다. 그 과정에서 삼성과 OB는 감정의 앙금이 크게 쌓였다. OB는 삼성전에는 유독 강한 승리 의지를 보였고 삼성은 이런 OB가 부담스러웠다.

삼성은 롯데와의 2연전에서 주력 선수들의 제외하는가 하면 공수에서 눈에 보이는 어설픈 플레이로 승리 의지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 타율왕 1위 경쟁을 하던 이만수를 위해 경쟁자였던 롯데 홍문종에서 고의 사구를 남발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했다. 결국, 롯데는 삼성과의 2경기를 모두 승리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성공했다.

삼성은 최동원에 절대 의존하는 롯데가 오히려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하 더 편한 상대로 여겼다. 1984 한국시리즈는 삼성대 최동원의 대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최동원은 삼성이 상상 그 이상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최동원은 7차전까지 이어지는 한국시리즈에서 4번의 선발 등판과 완투, 1번의 구원 등판을 하며 무려 5경기에 나섰다. 최동원은 5번의 등판에서 3선발승 1구원승을 하며 롯데를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이끌었다.

과정은 드라마틱 했다. 5차전 경기에 선발 등판한 최동원은 완투했지만, 결과는 패전이었다. 최동원의 1, 3차전 완투승으로 삼성과 맞섰던 롯데는 필승 카드의 실패로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밀렸다. 6차전은 최동원이 선발 등판할 수 없었다. 삼성의 우승은 문제없어 보였다. 하지만 6차전 롯데는 초반 리드를 잡았고 롯데는 5차전 완투했던 최동원을 구원 등판시키며 승리를 가져왔다.

이렇게 시리즈 전적 3승 3패를 이루긴 했지만, 롯데의 7차전 전망은 어두웠다. 이미 5차전 완투에 이은 6차전 구원 등판으로 최동원은 지칠 대로 지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어느 경기보다 중압감이 큰 7차전에서 그를 대신할 투수가 없었다. 삼성은 제일 동포 투수로 한국 시리즈에서 2승을 거둔 김일융이 버티고 있었다. 롯데로서는 여기까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반전이 일어났다. 7차전 경기에서 롯데는 다시 최동원 선발 등판 카드를 꺼내들었다. 분명 무리한 등판이었고 최동원 역시 한계를 벗어난 상황이었다. 롯데는 그럼에도 최동원  이상의 선발 카드가 없었다. 최동원은 팀의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최동원은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선발 등판이었다. 예상대로 구위가 떨어진 최동원은 초반 실점하며 롯데는 밀리는 경기를 했다. 하지만 최동원은 지친 몸을 이끌고 마운드를 계속 지켰다. 비록 4실점했지만, 에이스의 투혼은 선수들의 분발을 이끌었다.

경기 후반 롯데 타선은 추격전을 전개했다. 그리고 8회 초 롯데는 삼성 선발 투수 김일융을 상대로 2명의 주자를 출루시켰다. 그리고 타석에 선 류두열은 깜짝 3점 홈런으로 경기를 6 : 4로 뒤집었다. 류두열은 한국시리즈에 극히 부진한 타격으로 선발 출전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의 타순도 평소가 달랐다. 그 타순은 코치의 실수로 작성되었지만, 감독이 고치지 않고 그대로 출전시켰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이 홈런으로 롯데는 내내 밀리는 경기를 반전시켰다. 다시 힘을 얻은 최동원은 8회와 9회 삼성의 공세를 막아내며 롯데의 창단 첫 우승을 완성했다. 기적과도 같은 우승이었다. 우승은 당연하다 여겼던 삼성으로서는 허망한 패배였다. 이 패배 후 삼성은 오랜 기간 한국시리즈 징크스에 시달리며 불운의 팀이 되었다.

최동원은 이후에도 롯데의 에이스로 리그 최고 투수로서의 활약을 지속했다. 선동렬이라는 특급 투수가 프로에 데뷔하며 그의 명성이 빛을 잃어 같지만, 특유의 역동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투구는 변함이 없었다. 영화화되기까지 했던 최동원과 선동렬의 연장 15회 완투 대결은 우리 프로야구의 또 다른 명장면이었다.

이렇게 화려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최동원이었지만, 1987 시즌을 기점으로 그는 내림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잠재되었던 롯데 구단과의 갈등이 더 깊어졌다. 1988 시즌 연봉 협상에서의 대립은 시즌 개막까지 연봉 협상 타결을 불발시켰고 최동원은 그 해 시즌의 거의 반을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후 선수협 창설을 주도하면서 그와 롯데 구단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민주화 바람이 거세게 불던 시기였지만, 프로야구 선수들의 노조라 할 수 있는 선수협 창설은 구단들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선수협 창설을 불발됐다. 이를 주도한 최동원은 그 후폭풍을 피하지 못했다.

최동원은 1989 시즌을 앞둔 시점에 삼성의 에이스 김시진과 전격 트레이드 됐다. 롯데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최동원 역시 충격은 상당했다. 트레이드 이후 최동원은 삼성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삼성 선수로 2시즌을 보내긴 했지만, 롯데의 최동원이 삼성에서 재현되지 않았다. 이미 아마 시절부터 누적된 혹사의 후유증에 동기부여까지 떨어진 그는 부활하지 못했다. 1990 시즌 6승 5패 1세이브 방어율 5.28이 기록을 끝으로 최동원은 조용히 선수 생활을 마무리했다. 롯데나 삼성 어디에서도 은퇴식도 치르지 못하는 레전드의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이후 최동원은 지방의회 선거에 출마해 정치인의 길을 모색하기도 했고 예능인으로 가능성을 찾기도 했다. 해설가로 중계에서 그의 모습을 볼 수도 있었다. 지도자로서 그라운드에 돌아오기도 했지만, 그가 레전드의 역사를 쓴 롯데로의 귀환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롯데로의 귀환은 암 투병 끝에 사망한 이후 그의 영구결번이 결정되고 나서였다. 그 과정도 롯데 팬들의 강력한 여론에 구단이 마지못해 따른 결과였다. 현재 그는 사직야구장 인근에 동상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해 최고 투수에게 주어지는 최동원상이 만들어져 야구팬들이 그를 기억하게 하고 있다.

최동원은 프로야구 초창기 최고 인기 스포츠로 프로야구가 올라서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 그 마무리는 아름답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영원하다. 특히, 1984 시즌 한국시리즈에서의 초인적인 투구는 그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게 한다. 당시 리그 수준이 지금보다 높지 않았고 프로야구 초창기의 난맥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의 한국시리즈 4승과 절대 열세라는 롯데의 우승은 프로야구에 대한 대중들의 더 큰 관심을 불러오게 했다. 외국인 투수들이 리그를 이끌어가는 현실에서 철완이라 불리던 최동원은 자꾸만 떠오르게 되는 이름이다.

칼럼니스트 지후니74 / 출사를 즐기며 프로야구 롯데를 응원하는 소시민]
※필자와의 협의하에 본명 대신 아이디로 필명을 대신합니다.
※본 칼럼은 필자의 블로그에도 동시연재중입니다.(https://gimpoma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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