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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논단] 1989년 6월 4일 중국에 무슨 일이 있었나

칼럼니스트 이우진 승인 2020.06.04 15:44 의견 0
https://www.youtube.com/watch?v=LPR2O4uHWLM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 덩샤오핑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이 총리 리펑에게 무력 진압 명령을 내리면서...

1989년 6월 3일.

대학생과 시민들, 그리고 노동자, 지식인들 거의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있었다. 이들은 근 3달에 걸친 시위로 매우 지쳐 있는 상황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전, 온건파의 핵심 인물로 분류되던 당총서기 자오쯔앙(조자양)이 학생 대표를 만나고 돌아갔다. 돌아가는 길에 자오츠앙은 눈물을 흘리며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너무 늦게 왔구나!"

이후 자오츠앙은 덩샤오핑 이하 강경파에 의해 곧 가택 연금을 당했고, 6월 4일 0시를 기해 인민해방군의 전차, 장갑차, 그리고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병력들이 천안문 광장으로 밀고 들어왔다.

인민해방군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군대가 아니다. 자칭 인민을 해방시키는 중국 공산당의 군대, 즉 당군이다. ​국가에 속한 군대는 '부르주아와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는 압제의 도구'에 속한다는 마르크스의 이론에 근거해 어디까지나 '인민에 의해 자발적으로 조직된 집단'일 뿐이라는 해석을 적용한 것이다. 

그런 공산당의 군대, 인민의 군대가 인민을 학살하며 진압에 나선 것이었다. 서방 측에서는 이 날 진압으로 거의 1만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발표했다. 중국 공산당의 발표는 218명의 희생분이었다고 전한다.

​이 날 이후 민주화를 외치던 사람들은 모조리 체포되고 장기 징역을 살거나 처형 당했으며 공산당 내부의 온건파는 모조리 실각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겨우 미국으로 도망쳐 지금도 근근히 중국의 민주화를 위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

​무려 14억이나 되는 인민이 21세기에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표현의 자유도, 참정의 자유도 허락 받지 못한 채 공산당 입맛에 맞는 정보의 향유만을 허락 받는다. 홍콩인들이 격렬하게 저항하는데는 이런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

​중국의 민주화는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전세계인의 숙제이다. 무려 20년 이상 푸틴의 장기집권을 하고 있는 러시아조차도 모든 국민이 투표권을 가지며, 1당 독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

중국이 이런 후진적인 정치체제를 고수하고 있음에도 G2의 대열에 들어선 것은 단지 경제적인 이익 계산에만 집중한 서방 세계, 미국의 책임이 크다. 공산주의 체제는 어느덧 독재자를 길러내는 온실이 되어버렸다.

​홍콩의 시위를 단초로 지금의 상황에 대해 책임있는 자들의 책임있는 의식 변화를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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