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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민_이야기(21)] L은 거짓말쟁이?

칼럼니스트 봉달 승인 2019.03.23 09:00 의견 0

같이 일하던 기자 중에 그런 떡고물을 주로 찾아다니던 사람 L이 있었다. 짭짤한 업체들을 찾아다니며 형님 동생 하고 뒷돈을 받거나 향응을 제공 받는 식이다. 시골 동네 일간지지만 정치, 경제, 사회, 스포츠부 등으로 나름 체계를 갖춰 각자 전문분야를 나눠 담당하는데 이 사람은 언제나 경제부를 도맡아했다.

나는 상관이 없었다. 광고주랍시고 갑질하는 것도 싫었고 잘 봐달라거나 뭐가 부족하다는 식의 되도 않는 소리 듣고 다니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내가 주로 담당하던 건 커뮤니티 안의 비영리단체들이었다.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곳이 대부분이지만 아무래도 나랏돈 받아먹는 특성상 민주당 지지 성향이 크다. 특히 마당집 같은 데는 시카고 재향군인회 틀딱 영감들이 빨갱이라 부를 정도로 약간 치우친 감이 없잖아 있다.

요새 모국의 꼬라지가 안타까워 우파 페친님들과 더불어 까쓰통 옆구리에 차고 태극기 흔들러 나갈 각오를 하고 있다마는, 내 본래 성향은 약간 왼쪽 리버럴이다. 현실주의적이지만 PC를 부정하진 않는다.

마당집은 나와 잘 맞았다. 취재처 비영리단체 중 근무자나 자원봉사자들의 평균 연령이 낮은 편이고 다른 무늬만 비영리단체와는 달리 ‘영리’를 추구하지 않는 순수함(이라 쓰고 무능함이라고 읽는다)이 있었다. 되도 않는 이상향적 평등, 자유이민 어쩌고 하는 거야 어린애들이 뭘 잘 몰라 원래 그런 거고 가면 마음 편하게 놀기 좋았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쪽으로 많이 다녔다.

비영리기관들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쓰기로 하고, 아무튼 나는 돈 되는 업소 돌아다니기가 싫어 나름 만족이었는데 문제는 주말 취재였다. 주중이야 각자 담당만 돌아다니면 되지만 주말엔 당직 기자 둘이 서로 나눠 취재를 다녀야 했다. 취재거리가 10건인데 그 중 경제 관련이 5건이고 나머지 쩌리가 5건이면 괜찮지만 경제 부문은 3건이고 나머지가 7건인 경우에도 이 양반이 본인 담당만 가겠다고 해서 문제가 생겼다.

취재는 핑계고 가서 삐대다 그놈의 형님 아우들끼리 좋은 데 가곤 하니까 다른 취재처 커버가 안 되는 거다. 무슨 취재처든 반반씩 가르면 난 괜찮은데 6:4 어쩔 땐 7:3 그것도 지는 아침에 몰아서 하고 나는 하루종일 이런 식이니 좀 너무하지 않은가 싶었다. 마침 다른 기자들도 짭짤한 데만 독식하려는 L의 행태에 불만이 많은 상태였다. 그게 자정 노력을 무색하게 해서일 수도, 아니면 솔직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좀 노나먹어야 되는데 욕심 사납게 혼자 다 쳐먹으려고 그래서였을 수도 있다.

L을 제외한 나머지 기자들이 하나가 돼 회의 시간에 이의를 제기했으나 요지부동이었다. 본인의 담당처는 본인만이 잘 취재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건 사실 나는 상관없었는데 왼갖 쩌리 행사를 나더러 다 가라고 하는 건 좀 그랬다. 시간 배분을 공평하게 나눠하자고 했지만 선약이 있다는둥 취재원을 만나기로 했다는둥 핑계를 대며 막무가네로 안 된다는데 어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당시 나는 막 미국에 와서 딱히 만나는 사람이 있던 것도 아니고 지하실 두더지굴에서 같이 살던 친구가 사랑을 찾아 나간 후로는 어차피 혼자여서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냥 주는대로 일하기는 했는데 속으로는 참 이런 인간도 있구나 싶긴 했다.

재미있는 건, L은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뻔한 거짓말을 하지만 사람을 대할 때 굉장히 나이스하고 예의가 바르다. 때문에 같이 오래 일하거나 어울린 경우가 아니라면 그를 좋게 볼 수밖에 없다.

*글쓴이: 봉달(필명)

서울대 정치학과 졸업. 한국에서 상사 근무 후 도미, 시카고에서 신문기자 생활. 물류업체 취업 후 관세사 자격증 따고 현재 캐터필러 기차사업부 Progress Rail의 통관부서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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