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일본을알자] 100세 구 육군 정보장교의 주장과 한일관계

정회주 전문위원 승인 2022.08.23 13:27 의견 0

NHK 및 TBS의 종전기념일 특별방송 [출처: NHK, TBS 홈페이지]


매년 일본에서는 8.15일 종전기념일을 전후해서 전쟁 관련 특별보도가 이어지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각 언론사들은 과거 2차대전 관련 내용을 보도했다. 공영방송인 NHK는 “지금 전쟁과 평화에 대해 생각한다(いま、戦争と平和について考える)”는 주제로 오키나와 전투와 학도병 출병 등 다수를 보도했고, 민영방송인 TBS도 “NO WAR Project, 연결하고, 연결된다(つなぐ、つながる)”며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을 SNS 상에서 공유하거나 “전쟁과 거짓말(戦争と嘘=フェイク)”이라는 특별 프로그램 등을 방영했다.

또한 TV TOKYO도 “육군 나카노학교 전 장교가 말하는 정보(陸軍中野学校 元将校が語る‘情報’”라는 내용을 방영했는데, 나카노학교란 2차대전 당시 활동한 정보 ․ 특수요원을 교육하던 기관이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은 일본을 선진국으로 만든 명치유신으로부터 77년이 된 해이며, 올해는 패전(일본에서는 종전이라는 표현을 사용)으로부터 77년이 되는 시점이기에 1941년 육사를 졸업 후 일본의 정보학교인 나카노 학교 2,170명의 졸업생 중 한 명이며, 올해 100세인 정보장교 출신 무타 테루오(牟田照雄)가 최근의 국제 정세 및 일본의 패전 원인에 대해 인터뷰를 했다.

사실 패전 당시 20대 청년들은 이미 100세에 근접하여 기억조차 하기 힘든 은퇴 세대이지만 그(무타 테루오)는 명확하게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였고, 최근까지도 나카노 학교와 자신이 생각하는 정보에 대한 강의와 언론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이번 TV TOKYO와의 인터뷰 내용은 첫째,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해 “원래 원자폭탄 및 도시폭격을 한 커티스르메이(도쿄대공습 등을 지휘한 미공군 대장)가 수백만 명을 죽였고, 그것은 국제법 위반이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속에 일부 소련계가 상당수 있는데 그 속에 비밀기관이 잠입해 선동하여 우크라이나 정부의 탄압을 부추기는 등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비밀활동을 상당히 했을 것”이라며 미국이 일본에 대한 무고한 시민을 대량 학살했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선동해서 전쟁이 야기되었다는 식의 주장을 하였다.

둘째, 그는 기존의 군사영역의 경계 및 한도를 초월하는 현대전 형태를 지칭하는 중국의 초한전(超限戰)이 나카노 정보학교의 생각과 유사하다고 언급하였다. “중국은 대만 공격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당대회를 성공시키기 위한 하나의 위협성 행위다. (중국의 무력 공격 주장만을 고려해서는 안된다. 심리․경제전 등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면서 시진핑의 의도는 전면전이 아닌 심리전의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마지막으로 일본은 모든 정보수단을 동원하여 안전보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가운데 “‘誠’의 마음으로 비밀전을 수행해야 한다”,“일본 육군은 작전을 우선시했고, 작전참모는 획득한 정보를 간과하면서 작전에 부합하는 정보로 변경했다. 때문에 정보운용이 잘못되었다. 무력전은 순간적인 것이며, 오랜동안 ‘비밀전’심리전, 경제전, 외교전 등이 증가하게 되고, 지금(현대)은 사이버전, 비밀전 요원을 확보하는 사이버 요원을 확보(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TV TOKYO는 이번 프로그램을 2차대전 참전 정보요원의 인터뷰라는 희소가치 때문에 방영한 것으로 보여지나, 평소 그가 주장했던 내용, 즉, 유튜브에 남아있는 극우단체 강연회에서의 강연내용을 살펴보면 ①중일전쟁의 발단이 된 1937년의 루거차오(盧溝橋)사건은 “코민테른이 중국 공산당에게 명해서 일으킨 사건이다. 많은 증거가 있다.” ②“잘못된 중국과 한국, 종군위안부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러한 잘못된 것은 따져야 한다”③유엔의 공용 4개 국어를 비롯한 다수의 언어로 잘못된 역사의 진실을 말하고 역사전과 사이버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第74回 勝兵塾月例会, 2017.7.20.)하는 등 일본의 전쟁 책임과 반성이 결여된 선동적 발언을 지속해 왔다.

패전 직후 미국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점령군의 진입을 환호하며 반겼다. 이와는 달리 해외에서 돌아온 일본 군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선은 냉소 그 자체이었다. 전에는 반대할 수 없었던 사회 풍조인 옥쇄와 할복자살은 일순간 버려졌고, 전쟁을 일으켰던 관료와 군인들에 대한 처벌 주장이 이어졌다.

무타(牟田)가 국제법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던 르메이는 1945년 대일 폭격을 책임지는 제21 폭격기 사령부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목재 건물이 많은 일본 건물을 대상으로 소이탄을 이용한 폭격을 시행한 바 있다. 이런 르메이에게 일본 정부는 1964년 ‘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 훈장을 수여했다.

일본사회는 쿠우키(くうき:空気)라는 사회분위기에 의해 지배되는데, 패전직후 분위기와는 달리 지금의 일본의 쿠우키는 전쟁 책임론이 희석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며, 르메이가 유죄라는 무타(牟田)의 주장은 지금의 일본사회를 반영한다. 한일관계 개선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념에 의한 역사왜곡을 하는 선동발언은 지속될 것이고 이 같은 발언은 일본 사회 내부의 요구가 있기 때문에 반복될 것이다.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