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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06)] 토머스 핀천(Thomas Pynchon) 『바인랜드』

- 세상을 바꾸는 힘은 우연일까?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3.08 16:49 의견 0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토머스 핀천(1937년생인 그의 나이를 고려할 때 생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기는 쉽지 않을 듯하다)은 처음부터 작가를 지망하지 않았다. 공대를 다녔고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Boeing)에서 근무한 적도 있다. 그러다 작가로 전향했다. 괜찮은 집안에서 태어나 우수한 머리를 지닌 사람이었고, 인문, 과학, 방송, 정치, 사이버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한 학습과 경험이 충분했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여러 영역의 지식이 그대로 작품에 반영됐는데, 작품의 내용을 독특하고 풍성하게 해주는 장점도 있으나, 역자나 독자들은 곤욕의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그러나 무심코 작품을 들고 읽어나가다 보면 난해함의 늪 속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어느덧 어렵게 밖으로 기어 나와 한숨 돌리는 짜릿함을 느낄 수도 있다.

『바인랜드』는 ‘바인랜드’라는 도시를 배경으로 일어나는 정치·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이다. 조이드는 과거 프레네시라는 운동권 여인과 결혼하여 프레리라는 딸을 두고 있는 사람으로 마약 중독자였다. 그는 국가의 보조금으로 연명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꾸준히 정상적이지 않은 스턴트 활동을 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과거 프레네시가 가담했던 단체를 감시하던 연방 검사 블록이 프레네시를 검거하기 위해 프레리를 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작품은 닉슨 시대부터 레이건 시대를 오가며 전개되고 당시 운동권의 소멸과정과 일반인들은 알 수 없는 정부기관의 횡포를 언급하면서 미국 사회의 부자유함과 파쇼적인 면을 부각하고 있다. 결말에 이르러서는 블록을 지원하던 예산이 삭감되면서 이미 소멸한 운동권을 좇는 그의 무의미한 만행이 그치고, 조금은 나아진 세상이 되는 듯한 느낌으로 마무리 된다.


◆냉전 시대를 이해해야 당시 미국 사회를 이해할 수 있다

세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국가를 떠올린다면, 미국이 떠오를 것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라는 독특한 지도자가 등장해 자유의 이미지가 많이 퇴색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대표적인 국가이다(의아하게도 민주주의 지수에선 우리나라보다 아래에 있다).

그런데 작품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의 모습이 아니다. 시기는 닉슨과 레이건으로 이어지는 공화당 정권 시대인데, 베트남 전쟁의 끝 무렵(철군)에서 레이건노믹스를 거친 시기로 냉전 대결에서 소련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유한 시점이다. 운동권 세력을 감시하고 그들을 검거하는 정보부가 존재하며, 검사 블록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한 여인을 강간하고 그녀를 운동권 내의 정보원으로 이용하기까지 한다.

즉, 정치·사회적으로는 반공 이슈가 있었고, 경제적으로는 세계화가 조금씩 진행되고 있던 시점이다. 소설은 1990년에 출간됐으니, 이전의 역사적 상황을 토대로 소설의 배경을 묘사했다. 반공시대의 사회는 미국이라고 하더라도 시민들의 사상자유가 억압됐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억압은 당연히 반공과 관련 없는 사람들의 자유마저도 강압할 수 있는 대의명분이 됐을 것이다. 소설 전반적으로 옥죄는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런 시대적 분위기가 그대로 녹아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냉전이라는 국제적 대립 속에서 민주주의의 선봉인 미국은 딜레마를 겪을 수밖에 없었는데, 자유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도 반공을 억눌러야 하는, 즉 ‘인민의 사상의 자유와 평등’을 전파하면서도 자국 내에서 사상의 자유를 억눌러야하는 압제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해야만 했으니까... 정치권력으로 시민의 자유를 억누르고 음모를 조작해서 무모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에 대해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으며, 정치권력은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유용하게 활용했음도 같이 알아둬야 한다.

◆왜 운동권은 사라져야 했을까?

작품에 등장하는 비밀 조직, 혹은 운동권은 내부 분열을 겪는다. 서로가 밀고자가 되기도 하고, 배신하기도 하고, 이용당하기도 하고. 거대한 정치권력 하에 비밀조직은 파헤쳐지면서, 소멸과정을 겪는다. 그들이 하고 싶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진실을 알리고 싶었을까? 아니면 새로운 정치권력을 만들어 내고 싶었을까?

작품 속에서 운동권은 소멸과정으로 등장하기에 그들의 지향점이 어디였는지 알 수 없다. 역사적인 시기를 고려할 때, 냉전에서 해빙기로 이행하면서 그들의 역할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반대는 곧 미군 철수로 사라질 수밖에 없었고,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정신도 미소의 대립이 화해국면을 맞이하면서 명분이 약해졌을 것이다. 이쯤 되면 명분 없는 싸움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추구할 법 하다.

여기서 우리나라 이야기를 좀 해보자. 해방 직후부터 숱한 운동권이 존폐를 거듭했다. 당시 목표는 독재정권에게 빼앗긴 자유와 민주주의를 되찾는 것이었다사실, 이전 시대를 고려해도 자유와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되찾는 게 아니라, 제대로 가치를 실현하자는 게 더 적절한 이해일 것이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문민정부가 들어서니, 386세대(과거 운동권)가 등장해서 새로운 정치권력의 일부분을 차지했고, 그 영역을 점점 확장시켜나갔다. 현재 그들은 586이 됐는데도 쉽게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해하기 어려운 점은 운동권이었던 많은 정치인이 그들이 그토록 비판하고 저항했던 권력의 후속인 정당에 소속돼 정치를 한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 정치가 대체로 우경화 됐기에 정당 구분이 모호하기는 하나, 상징적으로나마 구분돼 있었던 경계도 지워버린 듯하다.

작품 속 운동권과 한국의 현실을 볼 때, 운동권의 몰락의 이유를 생각해 보면, 첫째, 독자적 권력집단으로 발전할 수 없었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정당을 만들거나 아니면, 정치권력 일부분을 확보했어야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애매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북한이 존재하는 정치·사상적 현실의 벽이 있었으니 선택의 자유로움을 충분히 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남은 길은 당연히 기존 정당에 흡수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둘째, 기성 권력에 반대는 했지만, 비전이 없었다. 진실을 밝히면 끝이었을까? 독재가 물러가면 끝나는 일이었을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진실을 밝히고 난 후, 독재 이후의 비전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목표가 없었다. 독재가 사라지고 나니, 그들이 더 이상 달려갈 피니시 라인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셋째, 새로운 시대적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작품에서도 닉슨으로 시작해 레이건에 이르는 변화의 과정을 미국의 운동권이 쉽게 따라가지 못한다. 블록이라는 악당이 몰락한 것도 시대적 분위기에 따른 것이지 저항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운동권도 마찬가지다. 90년대 후반 시대적 분위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학내로부터 외면당했고, 특히 2000년대에 이르면 운동권으로 활동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사인가?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무기력하다. 액션 영웅도 아니고, 사회에 영향을 주는 사상가들도 아니다. 그저 잡히지 않는 목표를 설정해 놓고 허우적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시점에는 스스로 애써 나아가는 방향의 무의미함을 깨닫고 생존을 모색한다. 이들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시간이었다. 세계적 분위기가 바뀌고 나니, 생존의 길이 열린 셈이다.

이런 점에서 작가는 변화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의 무기력함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진실을 보여주지도 못하고, 신념을 위해 죽음을 감수하지도 않았던 운동권의 모습. 그리고 예산이 삭감되자 아무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정부 관료의 모습 속에서 최상위 계급 아래의 모든 계급의 소멸과 붕괴는 너무나 쉽다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결국,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으며, 때로는 막강한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어도 국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시간의 흐름과 우연의 연속이 우리가 사는 세상과 삶의 조건을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인랜드』는 포스트모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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