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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명승부 주인공, 롯데 임수혁을 기억하며

칼럼니스트 지후니74 승인 2023.04.19 09:42 | 최종 수정 2023.04.19 14:04 의견 0

1982년 시작된 이래 프로야구는 명. 암이 교차하는 역사를 수십 년간 쌓아왔다. 지난해에는 프로야구가 시작한 지 40년을 넘어섰고 반세기를 향해 달리고 있다. 프로야구 역사에서 가장 주목되는 장면들은 마지막 챔피언을 가리는 포스트시즌이다.

우리 프로야구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을 그 해 우승 팀으로 인정하고 있다. 정규리그 우승에 대한 가치를 떨어뜨리는다는 비판도 있지만, 복수 리그제가 자리 잡지 못하는 현실에서 포스트시즌은 우리 프로야구만의 독특한 방식을 더해 프로야구에 대한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프로구단들은 정규리그 우승 이전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 매 시즌 온 힘을 다한다.

이런 포스트시즌의 역사에서 명승부 안에 들어가는 대결 중 하나가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을 놓고 대결한 롯데와 삼성의 플레이오프다. 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는 삼성에 시리즈 전적 1승 3패로 몰렸지만, 내리 3연승하면서 한국시리즈에 진출했다.

당시 롯데는 객관적인 전력에서 절대 열세였다.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초인적인 역투에 밀리며 3승 4패로 롯데에 우승을 내준 이후 한국시리즈 우승을 단 한 번도 이루지 못했다. 1985년 전. 후기 리그제가 존재하던 시절 전기리그와 후기리그를 모두 우승하며 한국시리즈를 열리지 못하고 하며 우승을 차지하긴 했지만, 우승에 대한 영광이 반감되고 말았다. 이후 프로야구는 포스트시즌 제도를 수차례 변경했고 지금의 계단식 포스트시즌 대진을 이어가고 있다.

1999 시즌은 삼성이 한국시리즈 우승의 오랜 숙원을 이룰 절호의 기회였다. 삼성은 우승을 위해 그동안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확실한 에이스를 보강했다. 삼성은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중심 타자 양준혁에 현금을 더해 당시 해태는 물론이고 리그 최고 투수였던 임창용을 트레이드 영입했다.

해태는 모기업의 자금난에 함께 구단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이 있었고 구단 운영 자금 마련을 위해 임창용을 떠나보내는 결정을 했다. 이 트레이드와 관련해 공식적인 발표 외에 추가 현금이 더해졌을 것이라는 의혹이 많았고 삼성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삼성의 우승에 대한 의지는 확고했다. 이를 통해 마운드를 보강한 삼성은 리그 최고 강타선을 더해 우승 1순위 후보의 면모를 보였다.

하지만 삼성이 한국시리즈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롯데는 만만치 않았다. 롯데는 역대 KBO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외국인 타자로 기억되는 호세와 마해영, 박정태 등이 중심 타선을 이루는 만만치 않은 타선에 만만치 않은 선발 마운드를 구축하고 있었다. 여기에 전천후 투수로 등판하며 활약한 외국인 투수 기론이 마운드의 높이를 더했다.

삼성은 이런 롯데를 상대로 투. 타에서 앞선 전력을 과시하며 시리즈를 주도했다. 삼성은 4차전까지 3승 1패로 앞서며 한국 시리즈 진출에 단 1승만을 남겼다. 롯데에는 절망적인 상황이었고 5차전 승부 역시 삼성이 유리한 흐름이었다. 여기서 반전이 일어났다. 롯데는 3 : 5로 밀리던 9회 말 마지막 공격에서 외국인 타자 호세가 삼성의 마무리 임창용을 상대로 역전 끝내기 3점 홈런을 때려내며 극적인 승리를 했다.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그 해 임창용은 이름이었던 선발과 불펜을 가리지 않고 마운드에 올라 13승에 38세이브를 기록했다. 이런 그를 두고 삼성 핸드폰 브랜드명이었던 애니콜에 빗대어 삼성의 애니콜이라는 별명을 붙을 정도였다. 포스트시즌ㅇ서도 임창용은 삼성의 승리하는 경기에 매번 등판하며 승리를 지켰다. 5차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호세의 한 방이 시리즈 흐름을 달라지게 했다.

상승세의 롯데는 접전 끝에 6차전에 승리했다. 시리즈 승부는 7차전까지 이어졌다. 7차전은 팽팽한 접전이었다. 삼성이 선취 2득점으로 앞서갔지만, 롯데는 중반 이후 홈런포로 동점을 만들었다. 6회 초 0 : 2 밀리던 롯데는 호세의 솔로 홈런으로 한 점차로 삼성을 추격했다. 여기서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다.

홈런을 치고 더그아웃으로 돌아오던 호세에게 관중석의 삼성 팬이 오물을 투척했고 그걸 맞는 호세가 크게 흥분했다. 흥분한 호세는 관중석에 항의하는 표현을 강하게 했고 흥분한 삼성 팬들이 경기장에 각종 오물을 수없이 투척하면서 경기장이 아수라장이 됐다. 급기야 몰지각한 삼성 팬들과 롯데 선수들이 충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호세가 방망이를 관중석에 투척하는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경기는 상당 시간 중단됐다.

이후 심판진은 관중석에 방망이를 투척한 호세에 퇴장을 명령하고 경기를 진행하려 했다. 이에 롯데 선수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롯데 선수들은 주장 박정태를 중심으로 경기를 보이콧하고 경기장을 벗어나려 했다. 호세의 퇴장도 문제였지만, 경기 내내 툭하며 롯데 선수단을 향해 오물을 투척하는 관중들의 형태에 대한 반발도 작용했다. 정상적인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롯데 선수들을 더 자극했다.

결국, 롯데 프런트의 설득으로 롯데 선수들이 경기에 나섰다. 가까스로 상황이 진정되고 경기가 속행됐다. 롯데 선수들은 더 강한 의지로 경기에 임했고 마해영의 홈런으로 경기는 동점이 됐다. 이후 삼성이 8회 말 이승엽의 솔로 홈런과 김종훈의 2점 홈런으로 5 : 3 리드를 잡으며 승리를 목전에 뒀지만, 롯데는 포기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는 롯데의 의지는 9회 초 극적인 동점과 연결됐다. 그리고 그 주역은 대타로 타석에 선 임수혁이었다.

임수혁은 삼성의 마무리 임창용을 상대로 극적인 2점 홈런으로 때려냈다. 임창용의 바깥쪽 제구가 잘 이루어진 직구를 밀어친 결과였다. 이 홈런으로 기세가 오른 롯데는 연장 11회 초 임창용을 상대로 결승 득점에 성공했고 6 : 5로 승리하며 한국시리즈에 올랐다. 삼성에게는 또다시 포스트시즌 악몽이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롯데는 플레이오프 접전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한국시리즈에서 한화에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을 내주긴 했지만, 우승 이상으로 야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시즌을 보냈다. 임수혁의 플레이오프 7차전 동점 2점 홈런은 프로야구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두고두고 남을 한 방이었다.

그 결정적 홈런의 주인공 임수혁은 아마 야구 때부터 장타력을 갖춘 포수로 주목을 받았다. 임수혁은 대학 졸업 후 병역의무 이행을 위해 상무에 입대해 2년여를 보냈고 1994 시즌을 앞두고 열린 신인 드래프트 2차 1라운드에서 롯데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데뷔했다.

임수혁은 당시 롯데에 필요했던 거포형의 타자로 마해영과 함께 중심 타선을 구성했다. 임수혁은 포수이면서도 두 자릿수 이상의 홈런을 때려낼 수 있는 타자로 공격형 포수의 전형을 보여줬다. 여기에 득점권에서의 클러치 능력이 큰 장점이었다. 1999년 플레이오프 7차전 홈런포는 이런 그의 장점이 집약된 장면이었다.

이렇게 공격형 포수로 롯데의 주력 선수로 활약하던 임수혁은 2000년 불행한 사고로 프로야구 선수로서의 이력을 더는 이어가지 못했다. 2000년 4월 18일 LG와의 원정 경기에 선발 포수로 나선 임수혁은 주자 플레이를 하던 도중 2루 베이스에 갑자기 쓰러졌다. 야구장에서 이전까지 볼 수 없었던 돌발 상황에 모두가 당황했다. 마침 1루 주자로 있던 롯데 외국인 선수가 급히 임수혁에서 다가갔고 주변의 선수와 코치들이 그에게 달려갔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당시 임수혁은 부정맥을 앓고 있었다. 세심한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불행히도 그 경기에서 부정맥에 따른 발작이 일어나고 말았다. 즉시, 심폐 소생술을 시행하는 등 응급조치가 필요했지만, 이를 알고 시행할 이가 없었다. 경기장의 의료진 역시 상황 대처에 미숙했다. 우왕좌왕 하는 사이 그를 살릴 수 있는 골든타임이 지나갔다.

급히 앰뷸런스로 그를 병원으로 이송했지만, 교통 체증으로 이마저도 수월치 않았다. 수십 분이 흐른 후 병원에 도착한 임수혁은 극적으로 맥박과 심장 운동을 되살릴 수 있었지만, 장시간 산소 공급이 뇌에 이루어지지 못하면서 뇌 기능 상당 부분이 마비되고 신체 기능까지 제한적으로 유지되는 식물인간 상태가 되고 말았다.

임수혁의 사고는 스포츠 경기장에서의 응급의료 체계가 매우 부족했던 우리 프로야구 더 나아가 스포츠계 전체에 경종을 울리는 일이었다. 임수혁에 대해 현장에서 심폐소생술이 이루어졌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었다. 경기장에서의 조치는 매우 미흡했다. 임수혁은 들것에 실려 구급차로 옮겨졌다. 그렇게 허비된 시간은 임수혁의 시간을 2000년 4월 18일에 머물게 했다.

그리고 롯데의 한국시리즈 진출 역사도 함께 단절됐다. 롯데는 이후 2001년 김명성 감독이 시즌 중 심장마비로 타계하는 비극이 더해졌고 긴 부진의 늪에 빠져들었다. 롯데가 다시 포스트시즌 무대에 오른 건 긴 시간이 지난 후 로이스터 감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때까지 롯데는 꼴찌를 밥 먹듯이 하는 약체팀이었다.

임수혁은 이후 10여 년간 투병을 지속했다. 그를 기억하는 동료들과 각계각층의 지원과 응원이 있었지만, 임수혁은 그들의 염원과 달리 깨어나지 못했다. 2010년 2월 7일 임수혁은 40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 기간 소속팀 롯데 자이언츠 선수들은 매년 그를 돕기 위한 자선 행사를 열며 그를 기억하고 임수혁과 가족들에 대한 경제적 지원을 했다. 현대 유니콘스는 선수단 차원에서 매년 그를 지원했고 이는 현대 유니콘스를 이은 히어로즈 구단에서도 지속됐다.

하지만 이와 관련한 책임이 있는 롯데와 홈구장 관리의 책임이 있는 LG 구단은 임수혁 지원에 미온적 모습을 보이면서 팬들의 비난을 봤기도 했다. 특히, 롯데 구단은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이후 더 이상의 지원을 할 수 없음을 밝히기도 했다. 임수혁이 쓰러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그와 그의 가족들을 후원하는 야구계의 모습과 대조되며서 롯데 구단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기도 했다. 이후 임수혁의 가족들에 의해 제기된 민사소송으로 롯데와 LG 구단이 일정 보상금을 지급하게 됐지만, 소송 이전에 관련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못한 점은 아쉬운 부분이었다.

임수혁의 사고는 프로야구를 포함해 스포츠계 전반에 안전의식을 고취시키는 계기가 됐다. 특히,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선수들의 사고와 돌발 상황에 대한 대비가 강화됐다. 프로야구는 의료진이 상주하는 것에 더해 즉시 병원 이송이 가능한 앰뷸런스가 경기장에 배치됐고 프로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프로야구는 그 시점 이후 선수들의 부상 방지를 위한 시설 개선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하지만 스포츠 선진국에 비하면 여전히 선수 부상 방지와 사고 대응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이는 다른 스포츠 역시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임수혁은 한때 프로야구 선수로 활약하다 세상을 떠난 선수 그 이상의 의미로 남아야 한다. 임수혁의 불행한 사고는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운동선수가 아니어도 일상에서도 심정지 사고는 발생할 수 있다.

그때 이루어지는 응급처치는 한 생명을 살릴 수 있고 그와 관련되는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 다행히 최근 심폐 소생술 등 응급처치에 대한 관심과 그에 필요한 교육이 확대되는 현상은 긍정적이다. 즉각적인 심폐소생술 시행으로 심정지 환자들이 소생하는 사례가 늘어가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이렇게 임수혁은 선수로서는 큰 족적을 남기지 못했다. 1999년 포스트시즌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우리 사회 전체에 중요한 울림을 주고 떠나갔다. 이제 그가 세상을 떠난 지도 10년이 더 흘렀고 그의 이름이 프로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기억이 희미해질 시점이다.

하지만, 최소한 그가 2루 베이스에서 쓰러진 4월 18일 만큼은 그를 기리고 다시는 그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행사를 지속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의 소속팀 롯데에서는 그를 외롭지 않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또한,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지속되어야 한다. 이는 임수혁을 위해 남은 이들이 해야 할 일이다.

2023년 4월의 어느 날, 그가 하늘에서는 아프지 않고 마음껏 경기장을 뛰며 달리길 기원하며 임수혁을 다시 한번 기억해 본다.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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