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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펴보는 야구 역사,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한. 일전

칼럼니스트 지후니74 승인 2023.05.22 12:38 의견 0

스포츠에서 구기 종목은 국가에 대한 대표성이 상대적으로 크다. 특히, 축구와 야구는 한 경기에 많은 인원이 참여하고 팀 대 팀의 대결구도가 더 명확하고 강하다. 또한, 큰 야외 경기장에서 하는 경기이니 만큼 스케일이 크고 많은 관중들이 함께 한다는 점도 경기에 대한 열기를 키우고 보는 이들의 몰입감을 더해준다.

특히, 축구는 그 자체를 전쟁에 비유할 정도로 국가대항전으로서 그 열기가 뜨겁다. 이에 비해 야구는 야구를 하는 나라가 한정적인 탓에 국가대항전 성격이 다소 약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최근 열린 월드베이스볼 클래식 등에서 보듯 대회 참가국이 늘어나고 해당 국가 국민들의 관심이 커지면서, 가장 상위 레벨의 야구 국가대항전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특히, 야구가 최고 인기 스포츠인 우리나라에서 야구 국가대항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야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하며 전 국민적인 관심을 얻기도 했다. 이는 당시 침체기에 있던 프로야구가 회생의 길로 가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런 야구 국가대항전 중, 한. 일전은 다른 종목 그 이상의 열기가 있다. 매우 긴 프로야구 역사를 가진 일본과 비교해 우리 야구 수준이 한 수 아래로 평가받으며 한. 일전의 라이벌 성격으로 보기 어려운 시절도 있었지만, 2000년대 들어 한. 일 야구 국가대항전에서 한국의 승리가 잇따르면서 국민적 관심이 커졌다. 그 승리의 기록 중에는 올림픽과 WBC의 빛나는 성과가 함께 있었다.

이런 한. 일전 승리의 기록은 1982년 이미 있었다. 그 해 한국에서 열렸던 세계야구선수권 대회가 그것이었다. 그 대회는 우리 야구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회 우승을 차지했던 대회이기도 하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가 국제 대회에 참가할 수 없었던 시절, 세계야구선수권 대회는 가장 권위 있는 야구 국가대항전이었다.

그 대회에서 한국은 대회 주최국이었다. 야구협회는 그전 있었던 대륙 간 컵이라는 국제 대회에서 국가대표팀이 우승을 차지하며 국제경기 경쟁력에 대해 큰 자신감을 얻었고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유치에 도전했다.

마침 그 시점에 한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에 성공하고 이에 발맞춰 세계대회를 치를 수 있는 현대식 야구장 건설이 가능해지면서 대회 유치 활동에 가속도가 붙었다.

마침내 대회 유치가 결정되고 지금의 잠실 야구장이 건설됐다. 잠실 야구장은 이전에 없었던 대형 야구장으로 그 시설이나 규모가 세계적 수준이었다. 지금은 낡고 오래된 경기장이지만, 1980년대 지어진 잠실 야구장은 우리나라 야구의 메카로 프로야구 역사와 함께 했다. 그리고 프로야구의 열기가 경기장을 뒤덮기 전 온 국민들의 응원 열기가 함께 한 대회가 1982년 세계야구 선수권대회였다.

이 대회에서 한국은 우승에 대한 강한 열망을 보였고 대회 준비에 온 힘을 다했다. 이를 위해 야구협회 등은 프로야구 선수가 대회가 출전할 수 없는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1982년 출범한 프로야구에 아마 야구 상위 레벨 선수들이 진출하지 못하도록 해당 선수들이 실업팀 선수 신분을 유지토록 했다.

하지만 이미 프로야구가 출범하고 먼저 프로야구에 진출한 동료, 선후배들이 아마 야구에서는 받을 수 없었던 연봉을 받는 상황에서 우수 선수들의 프로야구 진출을 막는 건 무리한 일이었다. 직업 선택의 자유나 개인적 권리를 제한하는 이 조치에 상당수 선수들이 반발하면서 대표팀 구성에 난항을 겪기도 했다. 대표팀 선수로서의 사명감이나 애국심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야구협회 차원에서 국가대표 선수들에게 격려금을 지급하는 등의 유화책을 제시하면서 선수들의 프로 이탈을 막을 수 있었다. 물론, 요즘이라면 있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이런 대표팀에게는 우승 가능성을 높이는 호재가 더 있었다. 당시 아마 야구 최강국이었던 쿠바가 대회 참가를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강 팀 이미지가 퇴색됐지만, 1980년대 쿠바는 차원이 다른 야구를 하는 팀이었다. 쿠바가 대회가 참가했다면 한국은 홈팀의 이점에도 우승을 장담할 수 없었다.

쿠바는 석연치 않은 이유로 대회 참가를 포기했는데, 이는 정치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여전히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가 유지되는 국제정세 속에서 사회주의 국가였던 쿠바는 한국과 수교를 하지 않은 상태였다. 대신 쿠바는 북한과 오랜 기간 교류 협력을 해온 우방이었다. 남. 북의 대립이 극한 대립이 여전한 상황에서 쿠바가 한국에서 열리는 세계야구선수권에서 출전하는 건 큰 부담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모든 상황이 우승으로 향하는 길에 탄탄대로를 놓아주는 환경 속에 한국은 최고의 라인업으로 대회에 나섰다. 대표 선수 명단에는 메이저리그에서 큰 관심을 보였던 당대 최고 투수 최동원이 있었고 대학교 선수로 엄청난 구위를 과시하며 대표팀 에이스로 급부상한 선동열도 있었다. 또한, 안타 제조기라는 별명을 얻었던 최고 타자 장효조도 있었다. 그 외에도 당장 프로에 진출해도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선수들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대표팀의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대회 첫 경기에서 대표팀은 약체로 평가받았던 이탈리아에 패하며 불안한 출발을 했다. 우승 전선에 먹구름이 끼는 일이었다. 공교롭게도 이탈리아는 또 다른 우승 후보 일본에도 승리하는 이변의 팀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탈리아는 두 우승후보 팀에 승리하고 나머지 팀들에게 모두 패하는 도깨비팀의 면모를 보였다.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의 일본전 승리는 한국 우승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패배를 기점으로 심기일전한 대표팀은 연전연승하며 승수를 쌓았다. 그 결과 대표팀은 대회 마지막 날, 일본과 우승을 놓고 마지막 결전을 치르게 됐다. 두 팀은 이전까지 동률을 이루고 있었고 마지막 대결에서 우승을 결정하게 됐다. 말 그대로 외나무다리 승부였다.

여기에 한. 일전이라는 특수성이 더해지면서 그 대회 한. 일전을 바라보는 국민들의 열기는 뜨거웠다. 더군다나 대회가 열리는 시점에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 문제가 한. 일 현안이 되면서 국민들의 한. 일 승리의 열망은 더 커졌다.

하지만 그 경기를 앞둔 대표팀의 상황은 긍정적 전망을 하기 어려웠다. 대표팀은 한. 일전을 앞두고 열린 호주와의 경기에서 치열한 연장 접전을 펼쳤고 그 경기가 다음날로 이어지면서 한. 일전이 열리는 오전까지 경기를 치러야 했다. 대표팀은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경기에 나서야 했다.

그 영향 탓인지 대표팀은 일본 선발투수에 완벽히 막히며 빈타에 허덕였다. 대표팀은 대회에서 에이스로 맹활약한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 선동열을 선발 투수로 내세웠지만, 초반 실점으로 내내 밀리는 경기를 해야 했다.

점점 패색이 짙어지는 상황에서 기적 같은 반전이 일어났다. 8회 말 한국은 득점 기회에서 무려 5득점하면서 0 : 2의 경기를 5 : 2로 반전시켰다.

이 과정은 매우 극적이었습니다. 우리 프로야구의 레전드 유격수 중 한 명인 김재박은 상대 투수의 높은 공을 개구리가 점프하는 동작으로 절묘한 번트 안타를 만들며 동점을 이뤄냈다. 지금도 개구리 점프로 불리는 이 장면은 우리 야구사에 남는 명장면이 됐다.

이에 기세가 오른 대표팀은 연이은 안타로 기회를 이어갔다. 극적 반전의 마침표는 한대화가 마무리했다. 한대화는 일본 투구의 공을 좌측 폴대를 맞히는 대형 홈런으로 연결하며 대표팀의 역전 드라마를 더 극적으로 만들었다.

이 홈런 한 방으로 한대화는 프로야구 진출 이후에도 찬스에 강한 타자라는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갈 수 있었다.

역전 후 대표팀은 선동열이 9이닝을 완투하며 추가 실점 없이 경기를 마무리했고 우승의 영광을 홈에서 안을 수 있었다. 당시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그 순간을 마음껏 만끽했다.

이렇게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우리 야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대회였고 야구도 국가대항전을 통해 국민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입증한 대회이기도 했다.

2000년대 들어 우리 야구가 2006년, 2009년 WBC 4강과 준우승, 2008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은 1982년 그 대회의 역사가 밑바탕에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대회 우승의 주역들은 다수가 프로야구에서 스타 선수로 활약했고 리그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그렇게 발전한 프로야구는 2000년대 야구 국가대항전 선전의 바탕이 됐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는 젊은 세대에게는 가물가물한 기억 속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그때의 우승은 우리 야구의 소중한 유산이다. 축구로 비교하면 2002년 한. 일 월드컵 4강 진출에 버금가는 일이었다.

최근 우리 야구는 국제 대회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연이은 국제 대회 부진은 야구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주고 있다. 야구 전반의 수준차에 대한 우려도 크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 대회 당시 한국은 우승에 대한 의지와 달리 우승을 장담하기 힘들었다. 특히, 일본과의 결승전은 여건의 불리함이 더해지며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대표팀은 승리에 대한 강한 의지와 절실함으로 이를 뒤집었다.

최근 야구팬들이 실망하는 건 국가 대항전에서 선수들의 경기에 대한 절실함과 진정성에 대한 아쉬움일지도 모른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를 다시 살피며 국가대표 선수가 가지는 무거운 책임감을 야구 모든 구성원들이 생각해 봤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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