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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전투선] 조선 수군의 돌격함 거북선 3

이호국 작가 승인 2023.12.22 08:37 | 최종 수정 2024.01.17 04:32 의견 0

실제 크기의 판옥선과 거북선을 3D로 복원하면서 얻어진 지식이 몇몇 있습니다.

판옥선 글에서 언급한 키(방향타)의 위치로, 거북선 역시 키의 위치는 판옥선과 같은 이유로 2층 배치가 옳다고 봅니다. 또 다른 문제로는 거북선 2층의 창문 문제인데, 기존 수많은 복원 사례에서는 이 창문을 통해 외부 관측과 활을 쏘는 기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막상 실제 크기로 복원을 해보니 이 창문은 창문이 아닌 판옥선의 3층 상갑판 여장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러운 의구심이 듭니다. 그러나 상갑판의 여장이라면 포혈이 있어야 하는데 그림에선 포혈이 없습니다.

또한 좌측의 통제영 귀선의 그림에선 판옥선 2층 갑판 방패 판에서 바로 개판을 한 모습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귀선도설(龜船圖說)의 통제영 거북선(좌)과 전라좌수영 거북선(우)의 모습.

실질적인 3D 복원 과정에서 2층 구조와 3층 구조의 거북선 고민보다 더 큰 고민이 이 부분에 있었습다. 앞에서도 몇몇 사례를 들며 전제했지만, 개인적으론 판옥선과 같은 이유로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은 3층 구조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층 방패판의 구조와 3층 여장 구조 설명도.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그래서 첫 거북선을 복원 할 때 중전선(판옥 중선) 2층 갑판의 높이를 조금 줄여 각선도본 전라좌수영 거북선 그림처럼 창문을 3층 상갑판의 위에다 배치, 개판을 제외한 전체 높이를 판옥선의 높이와 같게 맞춘 것입니다.

복원 중인 중전선과 거북선의 높이 비교.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이 과정에서 결론지어진 문제가 하나 있는데 실제 크기의 모델링을 해본 결과 굳이 창을 낼 필요가 없었습니다.

3층 상갑판의 내부 모습으로 판옥선의 여장 부분을 나눠 창을 내었다.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창 아래 포혈에서 의외로 외부의 모습이 잘 보였으며, 실제 이 공간에서는 활을 쏠 여유 공간이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합니다. 활을 쏘려고 마음먹는다면 굳이 못 쏠 이유는 없지만, 활이나 승자총통과 같은 개인 무기 문제에 관해선 오히려 개판 부분 십자로에서 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입니다. (실제 기록에서 이 십자형 통로는 나중에 일자형 통로로 변경됩니다)

또한 거북선은 장거리 포격이 필요 없는 함선입니다.

거북선의 임무 자체가 적 선단 깊숙이 들어가, 진(陣)을 흐트러트리는 전술뿐이라 곡사로 화포를 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이에 실제 크기의 복원에 대한 결론을 내려보자면 역시나 판옥선 위에 바로 개판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라 판단합니다.

복원한 거북선 개판 부 모습.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근래에는 중앙부의 돌출형 개판을 한 거북선의 모습이 대세로 떠오르지만, 계속 언급했듯 그냥 판옥선 위에 지붕 전체를 둥근 형태로 개판을 해도 공간적 제약이 따르는 판에 같은 3층 구조라도 중앙 부분만 개판을 하면 사실상 포를 쏘는데 너무나 불편합니다.

더 정확히는 당시 조선의 화포 장전 방식상 공간이 나올 수가 없으며, 대장군전과 같은 거대 화살을 장전할 시는 더더욱 공간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3층 구조에 지붕 전체를 개판하면 3층에서 화포를 쏠 수 없다는 주장에 관해서도 한마디 덧붙이자면, 그럼 판옥선도 같은 원리로 마찬가지가 됩니다. 오히려 무게 중심은 판옥선보다 거북선이 안정적으로, 판옥선 여장 위에 유선형의 둥근 개판을 낮게 하면 화포들을 발사했을 때 배의 복원력에 지장이 사실상 없게 됩니다.

단, 개판 위에 철갑을 두른다면 함포 발사 시 배의 복원력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거북선 철갑의 기록은 일본 기록에서만 존재할 뿐 조선의 기록에선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는 실록이나 이순신이 직접 작성한 임진장초, 난중일기에서조차 전혀 기록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거북선 지붕 위에 철갑을 두를 기술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당시 조선의 수많은 성문(城門)에는 대부분 화공에 대비해 문들 대부분이 얇은 철로 덮여 있었기에 거북선 개판 위에 철갑을 두르려고 마음먹는다면 충분히 두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북선의 개판 위에 철갑을 둘렀다면 이순신이 기록하지 않을 이유도 없거니와 일단 철을 두를 거북선의 지붕이 너무 크기에 재정적 부담도 많이 갔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붕 개판과 함께 십자로를 낸 이유도 적의 등선을 막고 화공에 대한 대비책에도 포함되기에 굳이 철갑을 둘렀을까 하는 생각마저도 들게 합니다.

그리고 임란 당시의 왜군들에게 있어 거북선이 철갑선으로 보였던 실마리를 만일이지만 제시할 수는 있습니다.

어쩌면, 거북선 개판 위에 철이 아닌 흑칠(검은색 옻칠)을 했다면 철갑선처럼도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옻칠은 습기에도 강하지만 특히 불에 강하다. 화공에 대비하여 옻칠할 수 있으며, 옻칠하면 강도 또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이 옻칠에 관해서도 유추일 뿐이고, 무엇보다 옻칠 범위가 너무 넓고 크기에 3D 복원에서의 옻칠 표현은 아예 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 복원 이야기

임란 당시 거북선의 용 머리 기능성에서도 논쟁이 많았지만, 현재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된 상태로 고정형의 용머리와 들락날락하는 이동형의 용머리로 논쟁 요소가 압축된 상태입니다.

먼저 이동형 용머리의 근거로는 당파와 충파 전술을 위해 들락거린다는 이유를 들지만, 개인적으론 이 문제에 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또한 이순신 종가에서 내려오는 귀선도가 두 점 있는데, 이 중 한 점이 용머리가 없는 거북선 그림입니다. 이 거북선의 그림으로 인해 용머리가 들락거린 가설이 생겨났습니다.

용머리가 없는 거북선 그림. (이순신 종가)

이동형 용머리에 관해 부정적인 이유는 역시나 반복되는 이야기로 선조수정실록과 임진장초, 난중일기 등 용머리에 관한 내용은 아가리에서 현자총통을 발사한 내용밖에 없습니다. 또한 당파와 충파에 관한 가설에서도 부정적인 것이 당파와 충파에 관한 이해도가 없기에 그렇습니다.

먼저 당파와 충파에 관해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당파와 충파는 함선과 함선끼리의 충돌 공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조선 수군의 당파(撞破)는 포를 이용한 적 함선의 격침을 뜻하며, 충파(衝破)는 폭풍이 밀려왔을 때 함선 간의 결속을 제대로 못 해 충돌한 경우를 뜻합니다. (당파와 충파에 관해선 따로 편성하려 합니다)

조선 후기라면 모를까 임진왜란 당시의 이동식 용머리는 분명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머리가 이동하게 되면 무게 중심이 달라지기에 배의 복원력에 있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참고로 무엇 때문에 조선 수군이 배로 적선에 충돌하겠습니까?

육중한 판옥선과 거북선이라도 적 함선에 충돌할 이유가 없습다. 어찌 됐든 충돌을 하게 되면 선체나 노가 파손되거나 무리가 오고, 선체 내부의 아군에게도 충돌로 인한 인명 피해는 그대로 전달되기에 그렇습니다.

가장 중요한 맹점은 수많은 화약이 적재돼있는 판에 일부러 충돌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가 없으며, 혹여 화약에 불이 붙는다고 상상만 해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너무 뻔하기 때문입니다.

복원을 완료한 용머리의 모습 1.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그리고 3D로 복원 중인 거북선 용머리는 완료가 된 상태입니다.

용머리 아가리에는 현자총통이 거치되어 있는데, 현자총통은 천자(天字)·지자(地字)에 이어 세 번째로 큰 화포로 태종 때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전장은 75.8cm, 구경은 6.5cm, 외경은 10.0cm로 차대전과 현자 철환, 인마 살상용의 작은 탄환인 조란탄 100개를 발사할 수 있습니다.

차대전을 장전한 현자총통의 모습. (거친펜 스튜디오)

또한 거북선은 짧은 거리의 큰 적선 지휘소를 아가리에 거치된 현자총통의 고각 발사로 박살 낸 기록이 있습니다. 이에 용 아가리의 주둥이 길이는 현자총통의 최대 고각에 맞춰 짧게 복원하였습니다.

복원을 완료한 용머리의 모습 2.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세 번째 복원 이야기

거북선 복원의 마지막 이야기는 노(櫓)에 관한 내용입니다.

노에 관한 논쟁은 전통식 노와 서양식 노의 논쟁으로 나뉘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도 본인은 서양식 노에 관해선 굉장히 부정적인 견해입니다.

서양식 노를 주장하는 이들의 근거는 배의 속도는 전통식 노보다는 앉아서 젓는 서양식 노가 앞서고, 적선의 초근접 상황이 오면 노로 접근을 막는다고 합니다. 1차 문제는 속도는 몰라도 일단 조선은 서양식 노를 저어본 적이 전혀 없다는 것에 있습니다.

계속 되풀이하는 소리지만 이 문제 또한 이순신이 기록을 안 할 리 없고, 서양식 노를 저으면 선회 반경이 넓어지는 점과 선체와의 각도에 따른 노의 길이와 각도의 마찰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보다 전투 시 노끼리 걸리거나 파손 등의 전술적 약점이 많아지게 됩니다. 또한 서양식 노를 젓기 위해선 선체 구조를 바꿔야 하는데, 그러려면 애초에 판옥선을 개발할 명종 시기 당시에 서양식 노를 채택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일단 명종 시대부터 조선 후기까지 서양식 노를 썼다는 기록은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고 적선의 초근접 시에 노로 막는다고 하는 부분에서는 사실 적선이 판옥선이나 거북선의 함포로 인해 근접이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적선 근접 시 발사하는 탄이 조란탄이고, 조란탄은 일반 철탄과 함께 발사할 수 있습니다. 혹여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그냥 질려포통이나 비격진천뢰로 날려버리면 그만인 것을 뭐 하러 노로 막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물론 명량해전에서 안위의 사례가 있지만, 안위의 사례는 아주 특수한 경우라 이 글에선 생략하고, 임진왜란 시리즈 세 번째인 조선 수군 이야기에서 조선 수군의 전략·전술에 관해 아주 상세히 다루겠습니다.

판옥선이나 거북선은 기본적으로 4인 1 노로 모습은 아래와 같고, 전투 시가 아니면 2인이나 3인이 노를 젓고 나머지 인원은 휴식을 취하는 순환 교대 방식입니다.

판옥선 내부와 노의 모습. (거친펜 스튜디오 · 스냅툰)

위 복원된 이미지는 판옥선 중에서도 제일 큰 통제사 전용 상선인 천자일호좌선의 2층 격군실 모습입니다.

거북선은 판옥선 중선이 기초 선이기에 이미지의 공간보다 훨씬 협소합니다. 천자일호좌선도 이런 상황인 판에 중전선 기반의 거북선에서 서양식 노를 4인 1 노로 젓는다는 건 효율 면에서도 상당한 무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로써 다섯 가지의 논쟁을 기반으로 한 거북선 복원 이야기는 모두 마무리됐습니다. 아무리 실체가 없는 거북선이지만 모든 복원엔 고증 근거가 최대한 뒷받침 돼야 합니다. 만약 근거가 부족하거나 없다면,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복원의 기본 원리이자 고증의 기본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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