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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說-대‘한심(寒心)’국] 9편: 조국 안 철수

조인 작가 승인 2019.11.09 10:36 의견 0

요즘 ‘조국(祖國)’을 떠올리면, 박물관에 전시된 흔하디 흔한 청동기 유물 같다.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겪는 동안 생긴, 군데, 군데 얼룩진. 그런데, 그 흔한 유물을 모든 박물관마다 소중하게 진열한다. 소중히 진열하지만, 실제 값은 하도 흔해서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사실, 황금이 흔하면 황금이 아닐 것이다. 다이아몬드도 흔하다면 그게 다이아몬드일까? 

어린 시절 ‘조국’은 떠올리기만 해도 뭉클해지는 특별한 무엇이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외제 학용품은 물론, 어떤 것도 국산 아닌 건 사용하지 않았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았다. 알고 보면, 외제가 아닌 건 별로 없다는 걸 그 시절에는 알지 못했다.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냥 애국 청소년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조국이 그런 거였다. 대단하고 위대하고 모든 걸 바쳐도 되는 그런 거. 내가 있게 해준 부모만큼이나 혹은 더 소중한 대상, 그러나 조국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지 않아서 더 신비했고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거라는 걸 조금 더 세월이 지나니 알 수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 처음으로 일제 워크맨을 샀다. 지금 세대 청소년들은 들어도 모를 것이다. 요즘은 MP3조차도 알지 못할 거다. 워크맨을 조금 친절하게 설명해주자면, 일본 전자제품 기업 소니의 모리타 회장이 어느 날 문득 ‘주머니 속에 휴대할 수 있는 라디오가 있다면?’하고 생각한 것이 워크맨을 역사 속에 등장시킨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뭐 대단한가 할 수 있지만, 회장이 제안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간부들은 반대했다고 한다. 그만큼 창조적인 제품이었다. 물론, 모리타 회장은 본인이 책임지겠다고 하면서 강행했고, 결과는 초대박이었다. 우리 시절 초등학교 졸업 선물로 가장 갖고 싶어 했던 졸업 선물이 바로 워크맨이었다.

당시 ‘소니’를 선두로 일본의 워크맨은 전 세계를 휩쓸었고, 국내에서도 삼성과 금성 등이 워크맨을 제조해서 내놓았지만, 정말 애국심이 넘치는 마음가짐이 아니면 용산 전자상가에서 일제 워크맨을 구입하는 게 당연할 정도로 제품 수준 차이가 컸다. 그러니까 한 20년 전만 해도 삼성이 소니를 넘어서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아이와’라는 일본 워크맨을 사서 귀에 꼽고 다녔는데, 이어폰이 귀에 딱 맞아서 외부의 다른 소리를 듣지 않아서 좋았다. 물론, 당시에는 지금처럼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지도 않았고, 휴대폰도 2000년 넘어서야 대중화됐기 때문에 음악을 들으려면 테이프가 들어가는 말이 휴대용이지 들고 다니면 꽤 무거운 휴대용 라디오나, 워크맨밖에 없었다.

당시에 외부와 단절된 채 걷는 기분은 꽤 영(young)한 기분이었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으려고 이어폰도 꼽고, 블루투스 이어폰도 사용하는데, 당시에는 40대가 넘어간 사람들은 이어폰을 잘 꼽고 다니지 않았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그들이 20대 때는 오직 라디오만 있었기에 이어폰을 사용한 기억과 추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40대들은 이미 10대 때부터 이어폰을 꼽고 자기 자신만의 시공간을 누렸던 기억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스마트폰을 사용하면서도 이어폰을 귀에 밀어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습관과 세대 차이가 무서운 것이다. 

어쨌든 내 첫 번째 일본 제품은 그렇게 구매됐고, 이후 소니 CDP도 구매해서 열심히 CD를 들었다. 테이프와 CD의 차이는 음질 차이, 가격 차이, 그리고 소장 가치의 차이? 정도였는데 가격이 2배 이상 차이가 나서 중·고딩들은 쉽게 구입하기 힘들었고, 나 역시 대학교 3학년 때나 돼서야 CD로 ‘간지’나게 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지금 그 물건을 달고 다니면, 원시인이 된 듯 대중들의 주목을 받겠지만, 당시도 소니 CDP 신제품을 들고 다니면, 관심 있는 사람들의 부러움 가득한 시선을 살며시 즈며 밝으면서 활보할 수 있었다. 

한 번이 어렵지 두 번, 세 번은 쉽다. 남자들끼리 하는 말 중에 “야동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실제로 그렇다. 고교 시절에 처음으로 포르노를 봤는데, 그 시절에는 누군가 어렵게 비디오테이프를 구하면 모두 그 집에 모여서 함께 관람하고, 못 본 애들은 빌려 가서 보고 돌려주곤 했다.

물론, 비디오를 빌렸다고 하더라도 집에 VTR이라는 기계가 없으면 소용없었고, 혹 모든 장비가 준비됐다 하더라도 부모님이 모두 안 계신 은밀한 날이 없다면, 그냥 검은색 플라스틱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런 어려운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요즘 말로 ‘아싸’면 비디오 테이프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나마 조금 논다는, 지금 말로 일진쯤 되는 애들이나 볼 수 있었지, 학교 열심히 다니는 평범한 애들은 쉽게 구경하기 힘들었다. 

처음 포르노를 접했을 때 느낌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다 아는 내용이었음에도 충격이었다. 마침, 시험 기간에 일찍 시험을 마치고 친구 여럿과 함께 모여 본 것인데, 이후 시험공부는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건 당연했고 시험 시간에 받은 시험지에도 어제 본 영상이 그대로 홀로그램처럼 솟아올라 당황했었다.

하지만, 이런 성적 호기심은 일상적으로 유지되기 힘들었는데, 당시는 야동처럼 인터넷에 접속하면 쉽게 볼 수 있었던 시절이 아니어서 한 번 보고 나면 한동안 보기 힘들었던 것이다. 거짓말이나 나쁜 짓도 계속하면 관성이 생겨서 죄책감이나 거리낌이 사라지는 데 은밀한 비디오는 자주 볼 수 없었으니 조금 시간이 지나면, 잊혀지기 마련이었다.

‘한 번 만 시리즈’는 비단 야동에만 속한 것은 아니다. 연인들 사이에서 섹스는 ‘한 번 만’으로 그치지 않는다. 한 번이 어려울 뿐이다. 아울러 성장기 아이들의 거짓말이나 도벽도 한 번에 그치지 않는다. 술도 그렇고, 담배도 그렇고, 도박도 다 한 번으로 그치는 게 별로 없다. 혹, 끊으려고 하면, 죽기를 각오하고 정리해야 한다.

정말 한 번으로 그치기 힘든 건 정치인들의 거짓말이다. 한 번 거짓말로 면피하면, 이미 발설한 거짓말을 또 면피하기 위해서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된다. 그렇게 계속하다 보면, 그냥 거짓말쟁이가 되는데, 이제는 거짓말이 정말인 거처럼 스스로 믿게 된다. 

조국(祖國)이 거짓말을 한 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언제나 조국은 거짓말을 해왔다. 잘 살게 해준다고 국민한테 거짓말했고, 더 좋은 세상 만들겠다고 조국은 거짓말했다. 조국만의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조국 탓이 아니라 그렇게 만든 사람 탓일 수도 있다. 가슴 뭉클하게 했던 조국 세뇌에서 벗어나면 처음에는 허탈한 심정마저 든다. ‘난 과연 누구인가?’ 이런 실존적 질문을 던지고 나서 깨닫게 되는 것은 조국과 나는 별로 상관없다는 허무한 성찰이다.

한일전 피 튀기는 축구 전쟁을 치러서 ‘대~한민국!’이 이겼다고 하자. 그래서 나에게 남는 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혹 있다면 승리의 카타르시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카타르시스를 정의했다. 웃긴 건 카타르시스는 희극이 아니라 비극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카타르시스가 희열과 같은, 아니면 스트레스 해소의 감정으로 대치된 걸까? 차라리 ‘해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가슴 속에 맺힌 게 뻥 뚫리는 느낌 같은 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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