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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고현학] 졸업과 졸업식의 고현학

방랑식객 진지한 승인 2024.02.09 15:56 의견 0

고현학(考現學)이란 '현대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유행의 변천을 조직적,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현대의 참된 모습을 규명하려는 학문'을 의미합니다. 일상의 고현학은 일상생활 속에 벌어지는 사안 하나를 주제로, 언제 어디서 시작되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펼쳐보는 이색코너입니다. 인터넷 검색 정보를 중심으로 정리해 넓고 얇은 지식의 층위를 높여가 보자구요!

곧 졸업 시즌입니다. 요즘은 학교장 재량에 따라 겨울방학 일정이 달라지기에, 벌써 졸업식을 했다는 학교도 있습니다. 졸업은 헤어진다는 아쉬움의 시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의 기대도 공존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졸업과 졸업식의 고현학입니다.

(출처: PxHere)


1. 들어갈 때는 ‘입학’이라고 하는데, 그런데 ‘졸학’이 아니라 ‘졸업’일까?

한자어인 졸업(卒業)의 의미를 한 글자씩 살펴봅시다. 우선 ‘졸(卒)’자인데요. 졸은 원래 하인이나 병졸을 뜻하는 말이었습니다. 무시당할 때 볼멘소리로 “나를 졸로 보냐?”하는데, 이 ‘졸’이 그 ‘졸(卒)’입니다. 병졸은 전쟁에서 가장 죽기 쉬웠던 존재였기에 ‘죽다’라는 뜻이 생겼고, 또 ‘죽다’는 의미에서 ‘무언가를 마치다’라는 의미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음은 ‘업(業)’입니다. 보통 이 글자는 일을 뜻한다고 알고 있는데, 자세히 보면 글자가 복잡하게 생겼죠? 사연이 있습니다. 이 글자는 청동기시대 때부터 쓰이던 글자인데요. 본래 종이나 타악기를 걸어두는 커다란 틀에 들어가는 ‘가로 판자’를 표현하는 글자였습니다. 그런데 문명이 발전하며 이 틀과 판자의 사용 방법도 발전했습니다. 글을 쓸 때 받치고 쓰는 도구로 쓰기도 하고, 담장을 쌓을 때의 도구로 쓰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틀에 들어가는 판자를 의미하던 것에서 ‘전문적인 일’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어요. 그래서 지금과 같은 의미와 함께 ‘학업’이라는 의미도 지니게 된 것입니다.

보다 보편적으로는 “밥 짓기 정도는 ‘졸업’한 지 이미 오래다”처럼, 어떤 일에 수련을 쌓아서 그 방면에 정통하게 되었다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2. 인류는 언제부터 졸업식을 했을까?

뜻밖에도 졸업식의 역사는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7세기부터 학교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측하는데요... 오늘날 전문교육기관이나 학회를 의미하는 ‘아카데미’는 플라톤이 만든 ‘아카데미아’가 기원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학업을 마친 학생들은 ‘승리의 행진’이라고 해서 졸업장을 받는 날 졸업장을 받으러 가며 학생 모두가 다 같이 거리를 행진하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이걸 졸업식이라 할 수는 없지만, 최초의 졸업 기념 행사라고 할 수 있거든요. 이 퍼레이드는 오늘날 그리스에서도 이어지고 있다고 해요.

한편 현대적인 졸업식은 중세시대 유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왜 졸업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graduation’이잖아요? 이게 ‘단계’ 또는 ‘학위’를 뜻하는 라틴어 ‘gradus’에서 온 말입니다.

라틴어는 로마 제국과 더불어 발전해 중세 이탈리아까지 사용된 언어인데 여기에 힌트가 있습니다. 최초로 알려진 졸업식은 11세기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렸습니다. 현대와 같은 대학이 등장하게 된 시기도 이때인데요. 중세 유럽에서부터 대학교에서 학위를 수여하는 공식적인 행사와 절차로 졸업식을 개최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3. 학사모가 사각형인 이유는?

학사모의 사각형이 중세 대학이 추구하던 4가지 학문인 신학, 철학, 법학, 의학을 뜻하는 것이라 하기도 하는데요... 실은 좀 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졸업식에서 한 학생이 노동복 차림에 손에 회벽을 칠할 때 쓰는 네모난 흙판을 들고 왔다고 합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참석한 귀족들이 이것을 보고 졸업식을 모독하는 일이라 꾸짖었지만, 이를 본 교수가 “저 학생은 졸업을 후 사회로 떠나 열심히 일하기 위해 흙판을 들고 온 거”라고 변명했습니다. 그때부터 졸업식에서 흙판을 본 딴 사각모를 썼다는 이야기입니다. 노동의 고귀함을 머리에 쓰고 살아가는 것이 졸업의 참뜻이라는 거죠.

또 학사모의 술은 고대 로마시대에 기원이 있다고 합니다. 노예들이 주인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면 자유의 징표로 술이 달린 모자를 썼던 역사적인 사실에 그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해방되어 사회로 나간다는 뜻에서 사각모에 술을 달았다고 해요.

아주 교훈적인 이야기지만 둘 다 근거가 미약한 썰이구요... 진짜는 이겁니다.

실은 15세기 교회 성직자들이 머리에 쓰기 시작했던 비레타를 대학을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도 씌워주게 되었고 세월이 흘러 사각모 형태로 변형되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우리나라 천주교 성직자들은 간소한 복장을 하시기 때문에 비레타를 보기가 어려운데요. 가끔 로마교황청을 보여주는 장면 보시면 머리 위에 작은 케익 상자를 얹어놓은 듯한 모자를 볼 수 있는데요. 비레타의 꼭대기 부분에는 공 모양의 예쁜 술이 올라가 있습니다. 그게 비레타입니다.

4. 우리 나라는 언제부터 지금과 같은 졸업식을 했을까?

기록에 따르면 한국의 최초 졸업식은 1897년 배재학당의 졸업식입니다. 정동감리교회당에서 열렸는데, 배재학당이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인데다, 당시 정부가 영어 교육을 위탁하고 개화된 인재들의 육성을 전폭 지원하고 있었던 터라 국가행사급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조선왕실과 정부 대신들, 주요국 외교관들까지 참석할 정도였다고 해요. 당시 졸업생 대표로 연설을 했던 사람이 22살의 이승만 대통령이었다고 해요. ‘조선의 독립’이라는 주제의 영어 연설이었는데, 조선과 중국의 관계부터 시작해 조선이 나가야 할 과제에 대해 유창히 발표해 감탄을 자아냈다고 합니다.

학사모와 학위복을 입은 최초의 졸업식은 1908년 제중원 1회 졸업식입니다.

대부분 제중원을 최초의 서양식 병원으로 아시는데요. 1885년 설립 당시에는 병원이었지만, 의학대학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1899년부터는 의학교육을 시작해 1908년 6월 8일에 7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거죠. 당시 졸업생들은 흰 바지와 저고리에 흰 두루마기를 입었지만, 그 위에 검은 가운을 입고, 머리에는 검은색 술이 달린 검은 사각모를 썼다고 합니다. 오늘날과 비슷한 졸업식 풍경이 연출되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5. 조선시대에도 졸업식이 있었을까?

물론 지금의 졸업식과는 크게 다르지만, 다음의 2가지를 설명드릴 수 있는데요. 우선 고유례라는 게 있었습니다. 고유례란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때 선현들에게 알리는 의식과 제사’를 통칭하는 것인데요. 학업을 시작하거나 마칠 때 고유례를 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학업을 시작할 때 공자님께 제사를 지내는 고유례를 행했습니다. 지금도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는데요. 성균관대학교입니다. 입학식과 졸업식 때 고유례를 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로 ‘책거리’입니다. 책씻이라고도 하는데요. 서당에서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배우면 스승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간단한 음식과 술 등을 마련하여 훈장님을 대접하는 작은 행사를 말합니다. 이때 추석이 아니라 해도 송편을 준비하곤 했는데요. 꽉 찬 송편처럼 학문이 꽉 차라는 의미로 먹었다고 해요. 스승에 대한 감사와 학업 성취를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는 풍습이죠.

근데 성균관 이야기가 나온 김에 말씀드린다면, 엄밀히 말해 입학식은 있었지만 공식적인 졸업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졸업을 의미하는 성균관 유생들 나름의 자체적인 이벤트가 있었어요.

6. 졸업식날 교복을 찢는 풍습은 언제부터?

졸업식날 뒷풀이로 교복을 찢는 짓꿎은 풍습이 있었는데요. 일제 강점기 교복문화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된 거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사실은 성균관 유생들이 시작한 겁니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때문에 뭔가 낭만이 넘칠 것 같지만, 실제 조선시대 성균관 유생들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가 있었다고 해요. 졸업 시험격인 고과(考課)가 있었는데, 일종의 내신성적 같은 걸 먹여서 과거 시험 당락에도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성균관 유생들은 푸른빛이 나는 청금(靑衿)을 입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게 일종의 교복이었던 거죠. 졸업시험인 고과(考課)가 끝나면 유생들끼리 청금(靑衿)을 찢는 풍습이 생겼던 겁니다. 근데 이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 까지 이르러 ‘파금(破襟)’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고 합니다.

7. 밀가루 뿌리고 계란 던지던 시절도 있었다

저도 당해 본 일인데요. 한겨울에 밀가루와 계란 세례를 받으면 매우 곤혹스러웠습니다. 겉옷을 다 버린 상태라 옷을 벗어들고 가다보면 너무 추워서 덜덜 떨리기도 하고요. 앞이 잘 보이지도 않아 집에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난감스러웠어요.

그런데 꿈보다 해몽이 더 좋다고, 이런 풍습에 대한 해석도 재미있는데요. 가장 만만한 게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자는 설입니다.

일제 강점기 때 일본 제국주의 교육에 대한 반감의 표시로 검정색 교복에 밀가루를 뿌리고 계란을 던졌다는 설... 백의민족인 대한민국의 국민으로 살아가라는 뜻으로 밀가루를 뿌림과 동시에 계란을 던져 껍질을 깨 식민지 교육의 틀을 깨고 조국의 독립에 힘쓰라는 의미를 담았다는 설이 가장 그럴 사합니다만, 식량부족에 허덕이던 당시에는 그랬을 리 없다고 생각합니다. 계란은 정말 귀한 거였는데 말이죠.

또 새하얀 것을 뒤집어씀으로써 그 동안에 있었던 좋지 않은 기억들을 모두 지워버리고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라는 설이 있는데, 그나마 이게 제일 좋은 해석인 것 같습니다.

다만 갈수록 도가 지나쳐 학교폭력 수준이 되면서 자정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는데요... 지금은 코로나19를 거치며 사람들이 모이는 행사를 자제하게 되면서, 또 출생률 감소로 청소년 인구가 줄어들면서 이런 졸업식 풍경을 보기가 더 어려워졌으니 정말 예측이 어려운 세상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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