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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푸틴_X파일(14)] 귀족체제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자

칼럼니스트 박광작 승인 2019.02.24 09:00 의견 0

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은 1918년 2월에 독일제국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즉 개별적 평화협정을 체결해 러시아의 유럽 지역 영토 4분의 1을 잃었다. 폴란드 및 발트 3국 영토, 우크라이나, 핀란드 지역까지 제정 러시아에서 분리돼 러시아 영토에서 사라졌던 것이다. 이 치욕을 잊기 위해 레닌 이래 소련 통치자들은 일차대전을 역사에서 사실상 지워버렸다. 일차대전에서 오직 10월 볼셰비키 혁명의 성공이란 결과만 있었다고 선전하였다.

라스푸틴도 독일제국과의 전쟁을 목숨 걸고 반대한, 차르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측근이었다. 볼셰비키 정권은 정권의 정당성을 로마노프 왕조의 타락과 적폐, 무능 그리고 억압체제에서 혁명의 불가피성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라스푸틴 암살 다음해 발생했던 1917년의 10월 혁명 후에도 라스푸틴을 ‘악마의 승려’, ‘섹스광’, ‘적국 독일 출신 알렉산드라 황후와 놀아 난 패륜의 미친 승려’ 등등의 유언비어를 퍼트렸던 것이다.

농민의 아들 라스푸틴이 제정러시아의 귀족체제의 모든 죄를 뒤집어쓰게 되었던 것이다. 볼셰비키 정권뿐만 아니라 권력에서 소외된 황족과 범슬라브주의 주전론자(일차대전 참전론자 및 평화협정 반대론자)들도 이에 앞서 라스푸틴의 명예를 먼저 먹칠하고 난 후 생명도 죽이는 살해 음모를 실행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독일제국과의 전쟁에서 제정러시아를 동맹 참전국으로 묶어두기 위해 영국도 라스푸틴 암살의 기획과 실행에 적극 가담하였던 것이다. 라스푸틴의 암살 사건은 러시아의 일차대전 참전과 러시아의 독일 제국과 별도 종전 문제와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추측되어 왔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그것이 사실로 입증된 것은 1991년 소련 연방의 붕괴와 함께 그동안 극비에 붙여졌던 자료들이 공개됨에 따라 스스히 그 진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라스푸틴 암살에 공모 또는 가담했다고 스스로 말했던 세 명은 유수포프 공작, 푸리쉬케비치 두마 의회의원, 의사 드 라초베르트(Dr. Stanislaus de Lazover) 등이다. 이들은 자서전 또는 라스푸틴 살해 관련 책을 남겼다. 차르의 조카 디미트리 대공은 본인 입으로 관련 사실을 공개 고백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한 부분의 암살 동기와 실행 과정만을 진술했다. 그래서 믿지 못할 부분이 매우 많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라스푸틴 이야기는 주로 이 세 음모가들의 버전이었다.

일차대전 당시 영국 비밀정보국(SIS)의 러시아제국 총사령부 파견 책임자 호어 경(Sir Samuel Hoare)도 라스푸틴 사건을 2차 대전 후에 공개했다. 그는 살해 음모극에 참여했던 또 다른 세력이 있다는 징후를 암시하였을 뿐이었다. 호어 경은 다음의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즉, 니콜라이 2세 차르가 당시의 페트로그라드 주재 영국대사 뷰캐넌(George Buchanan)에게 “영국 비밀정보국 공작원 라이너(Oswald Rayner)가 라스푸틴 암살에 개입하였다”는 것을 넌지시 이야기해 주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지난번 포스팅에서 영국 비밀 정보국 공작원 레이너가 1909년~1913년 유수포프 공작이 옥스퍼드대학에 유학하던 당시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였다고 언급했다.

페트로그라드(상트페트르부르크) 주재 영국 비밀정보국(SIS)의 주요 공작원은 4명으로 구체적인 인적 사항도 밝혀졌다. 호어(Hoare), 라이너(Rayner), 엘리(Stephen Alley) 그리고 스케일(John Scale). 근년에 와서 비밀 해제된 자료의 분석을 통해 영국이 라스푸틴 살해 공작에 참여했던 사실이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이들 공작원들의 교환 문건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

“사건이 계획에 따라 완벽히 진행되지 않았을지라도 우리의 목표(objective)는 분명하게 달성되었다. ‘어두운 힘’(라스푸틴 암호명)의 죽음에 대한 반응은 모두들 좋게 받아들여졌다. 물론 관련된 사람들이 많다는 불편한 질문들이 좀 있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라이너가 미진한 마지막 부분을 해치웠다.”

*글쓴이: 박광작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서울대학교에서 비교체제론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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