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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59주년(4)] 4.19혁명, 미완의 혁명이 지닌 가치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4.24 11:40 | 최종 수정 2019.07.15 14:41 의견 0

¶제 2공화국, 새로운 정부 수립

이승만의 하야와 동시에 각계각층으로부터 민주화의 요구, 부정선거 책임자와 부정축재자 차별요구, 통일운동 등 다양한 사회변화의 요구가 이어졌습니다.

▲ 1960년 5월 29일 미국 하와이로 망명을 떠나는 이승만의 모습. ⓒ 위키백과


한편, 당시 외무부 장관이었던 허정이 2개월간 임시적으로 과도정부를 맡게 되었습니다. 허정 과도정부의 가장 큰 숙제는 3.15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과 민주화였습니다. 과도정부는 6월 15일 정부체제를 내각 책임제로 변경하는 헌법을 세웠습니다. 이때의 의원내각제는 영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의원 내각제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2개월의 과도정부 이후 들어선 제2공화국은 한국 최초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였습니다. 투표를 통해 대통령에 윤보선, 국무총리에 장면이 선출되었습니다. 이들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세우고 경제적인 발전을 이룩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사회적인 분위기도 변화했습니다. 통제되었던 언론은 자유를 얻었으며, 한반도 통일 중립화방안과 평화 통일의 원칙이 제기되었고, 남북 협상론이 대두되었습니다.

▲ 중앙대학교 1960년 4.19 혁명 당시 내무부 앞 연좌시위 ⓒ 위키백과


그러나 민주주의를 지향해가는 과정이었던 제2공화국 시기는 결국 정국의 혼란으로 이어집니다. 집권여당인 민주당 내부에서도 권력투쟁이 일어나 구파와 신파로 나뉘는 일이 벌어집니다. 적극적인 개혁보다는 현상 유지에 초점을 맞추는 수준에 그칩니다. 결국 9개월만에 군부에 의한 5.16 군사쿠데타로 제2공화국은 몰락합니다. 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1979년까지 장기집권체제를 유지하게 됩니다.

¶4.19혁명, 순수한 민주주의 발전을 가져오다

4.19혁명은 정권이나 정치 이념을 변화하기 위한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정치지도자가 계획한 혁명도 아니었습니다. 독재와 부패정치에 분노한 시민과 학생들이 뭉쳐 이승만 대통령을 몰아낸 일생일대의 사건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민중이 최초로 정권을 쟁취하는데 성공한 셈이죠.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부패정권을 민중이 스스로 타도하는데 성공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혁명이라는 점에 있어서 그 가치는 높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앞장서서 혁명을 주도했으며 시민들이 가세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졌죠. 독재 정권은 무너졌고 민주주의 발전의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민주주의가 한반도에 자리 잡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외국의 민주주의를 따라하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 착각했지요. 하지만 민주주의는 그렇게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승만의 부정선거로 시민과 학생들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4.19혁명이 발생했습니다. 시민들과 학생들은 피로 민주주의를 수호했고 기존의 체제를 붕괴시켰으며 새로운 민주주의체제를 성립시킵니다.

▲ 5.16 군사정변 당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장도영과 부위원장 박정희 ⓒ위키백과


¶미완의 혁명, 또 다른 독재의 시작

4.19혁명은 분명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혁명이지만 미완의 혁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이 시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죠. 민주당 정권은 4.19혁명에서 발생한 민주주의 정신을 적극적으로 이어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과감한 정책을 수립하기보다는 자신의 세력 유지에 더욱 집중했죠.

어떤 의미에서 민주당 정권은 자유당보다 더욱 보수적인 집단이었습니다. 과도 내각을 담당했던 허정 역시 4.19를 ‘사태’로 평가했다고 하니, 모든 세력이 4.19를 지지하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들은 정국을 안정시키기보다는 신파와 구파로 나뉘어 분열과 대립각을 세우며 권력싸움에 집중했습니다.

민주당 지도층이 주도해서 발생한 시위가 아니라 시민들 사이에서 발생한 자발적 시위였기 때문에 혁명 이후 각계각층에서 요구하는 바가 많았고, 하나로 수렴된 결과를 도출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스스로 조직화된 지도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군부가 힘들지 않게 권력을 장악하게 만들었죠. 따라서 민주주의 혁명의 의의와 동시에 미완의 혁명으로 끝난 점에 대해 계속적인 성찰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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