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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연극 ‘황혼’ - "참과 거짓사이에 질문을 던지다"

김혜령 기자 승인 2017.04.05 00:05 의견 0
우리는 과연 ‘참’이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을까 어쩌면, 스스로를 거짓에 포장한 채 진짜 ‘나’의 모습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닐까

 

연극 <황혼>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다.

 

깜깜한 무대로 시작하는 연극. 서서히 빛이 들어오는 무대에 한 남자가 알몸으로 누워있다. 한참을 느린 행동으로 더듬더듬 움직이는 그는 맹인이다. 과거 젊은 나이에 시력을 잃은 그는 짐승들의 소리를 흉내 내는 일을 하며 알프스에서 살아간다. 무슨 이유인지 그는 20대의 젊고 교양이 있는 여성을 보내달라고 맹인협회에 계속해서 요청해왔다. 이윽고 그의 방에 화려한 화장을 한 여성이 나타난다. 그녀의 이름은 야스민. 맹인협회에서 보낸 여성이다. 그러나 그가 원한 20대의 젊고 교양 있는 여성이 아니라 50대의 여성에, 직업은 창녀다.

 

연극 의 김소희, 명계남 배우. 3월 31일 관객과의 대화 중. <p class=(사진: 김혜령 기자)" width="550" height="309" /> 연극 <황혼>의 김소희, 명계남 배우. 3월 31일 관객과의 대화 중. (사진: 김혜령 기자)

 

극 속 주인공들의 신분은 계속해서 변신한다. 젊은 저널리스트는 나치주의자로, 어느 작은 극장의 연극연출가로 끊임없이 거짓으로 자신을 포장한다. 여자 역시 창녀가 아니라 창녀를 연기한 맹인센터 직원이라 자신의 정체를 밝히고, 나중엔 로미오와 줄리엣을 연기하고 싶었던 여배우였다며 거짓에 거짓을 거듭하며 자신을 이야기한다.

 

극의 전개 내내 두 남녀는 거짓말과 거짓말로 둘만의 사랑을 확인한다. 계속되는 거짓 속에 어느 것이 진실인가의 혼란에 빠지게 만든다. 거짓과 진실 사이에서 진실을 인식시켜가는 과정은 철학교과서에서 들여다 보았던 '인식론'을 다시 곱씹어보게 만든다.

 

인식론이란 철학의 한 분야에서 앎에 대한 분야로 '무언가를 안다는 것', '무언가를 어떻게 알 수 있는지'를 연구하는 영역이다.극중 노인이 처음에 저널리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했음에도 후반부 들어 자신은 저널리스트를 싫어한다고 하는 장면은 '인식론'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극 전반부를 통해 관객이 '노인=저널리스트'라 인식했던 것을 떠올리며 '어떻게 저 노인이 저널리스트라고 인식했는지' 스스로 의심하게 하는 대목라 할 수 있다. 눈 앞에 펼쳐진 극 속 정보가 혼란스러워지며 "과연 무엇을 안다고 하는가"를 거듭 생각하게 만든다. 연극 속 주인공들의 거짓말은 극을 감상하는 내내 어떤 것이 진짜 그들의 모습인지 고민하게 만들며 관객 스스로 자신에게 '인식론'의 잣대를 대보게 만든다.

 

명불허전의 명배우 명계남. 극 초반 10분간 말없는 연기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p class=(사진: 김혜령 기자)" width="309" height="462" /> 명불허전의 명배우 명계남. 극 초반 10분간 말없는 연기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사진: 김혜령 기자)

 

특히 70대 맹인을 연기하는 명계남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우리는 신이요. 연극의 신. 우린 연기를 해야만 해!”라는 대사는 '우리 삶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 그것이 정말 진실임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 것인지' 솔직한 자문자답하게 만든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이 연극처럼 연기로 가득한 거짓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명계남과 김소희 두 배우의 연기가 없다면 이 극의 완성도를 말할 수 없다. 무엇보다 연극 서두에서 10분간 명계남이 선보이는 말없는 연기는 관객의 마음 속에 묵직한 울림을 선사한다. 김소희 또한 창녀부터 여배우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이는 야스민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여기에 한쪽 모서리가 객석에 닿은 듯한 마름모꼴의 무대는 배우들의 동선을 다양한 각도로 보게 만들며 연기의 입체감을 더해주고 등장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객석 정면에 모서리를 맞댄 무대공간. 두 배우의 연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p class=(사진: 김혜령 기자)" width="550" height="309" /> 객석 정면에 모서리를 맞댄 무대공간. 두 배우의 연기를 보다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김혜령 기자)

 

원작자 페터투리니는 현대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극작가로 치밀한 작품구성과 관객을 몰아붙이는 긴장감, 강렬한 주제의식을 두드러지게 다루며 ‘실험적 언어의 천재마술사’라 불리고 있다.

 

연극 <황혼>은 지난 해 11월 게릴라극장에서 명계남, 김소희 주연으로 초연되었던 작품으로 재공연이자 게릴라 극장의 폐막작으로 선정되어 지난 3월 31일 막을 올렸고 오는 16일까지 공연된다.

 

[김혜령 기자 / windschuh@si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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