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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리뷰] 말장난으로 관객들의 철학적 사고를 자극하다 -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김혜령 기자 승인 2018.05.04 01:10 의견 0

올해도 봄의 끝자락에 어김없이 관객 곁을 찾아온 고고와 디디. 서울 홍대 인근에 위치한 산울림 극장에서는 산울림 극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고도를 기다리며’가 한창 공연 중이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가 쓴 부조리극으로 베케트가 세계 2차 대전 당시 겪은 피신생활을 바탕으로 집필한 작품이다.

이 극은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극을 이끌어가는 사람은 블라디미르(애칭 고고)와 에스트라공(애칭 디디), 그리고 보이지 않는 미지의 인물 ‘고도’이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50년 동안이나 오지 않는 고도를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보려 의미 없는 대화를 주욱 늘어놓는가 하면, 아주 철학적인 담론을 담은 대사들을 읊어대면서 관객들의 가슴을 콕콕 쑤시기도 한다.

서로를 의지하며 50년간 지루한 '고도 기다리기를' 지속하는 고고와 디디.

(산울림 극단 제공)

극의 중반에는 포조와 럭키라는 두 인물이 등장한다. 포조와 럭키는 이방인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과 달리 그 마을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의 대사 역시 역시 의미 없이 흘러가지만 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동시에 디디의 기억이 부정확해지는 시점을 만든다. 디디는 자신의 기억이 왜곡되었다고 생각하며 혼란스러워한다.

더욱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고도의 존재다. 극이 끝나가는 그 순간까지도 고도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고도 밑에서 일한다는 아이를 통해 ‘고도씨는 오늘 오지 못한다. 내일은 꼭 온다’는 말만 반복적으로 전달받으며 그의 존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극이 전개되는 과정 속에서 ‘포조가 고도일 것이다’, ‘고도의 말을 전달하는 아이가 고도일 것이다’라는 추측만 계속된다.

"어느날 갑자기 저놈은 벙어리가 되었고 나는 장님이 되었소" 근황을 전하는 포조.

(산울림 극단 제공)

이렇게 그들은 고도가 온다는 말만 믿으며 50년의 세월을 희망고문 속에 살아왔다. 심지어 고도를 기다리다 지친 두 사람은 자살까지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살마저도 허용되지 않는다. 에스트라공의 바지춤 끈으로 목을 메려했던 두 사람은 끈이 끊어져 자살에 실패하면서 자살조차도 포기하는 무력감에 빠진다. 내일은 꼭 튼튼한 끈으로 자살하자는 말과 함께 극이 마무리된다.

극 속 고고와 디디의 고통은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강렬한 메시지로 다가온다. 고도를 만날 거라 작은 희망을 품은 채 매일을 살아온 고고와 디디의 모습에서 헛된 희망을 품고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텨가는 우리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다. 끝내 오지 않을 희망의 실오라기를 붙잡은 인간의 나약함에제대로 직면하는 순간이다.

또한 시간의 흐름을 완벽히 기억하는 인물은 블라디미르, 디디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오늘인지 어제인지 기억하지 못하며 심지어 장소도 기억하지 못한다. 포조는 어제는 눈이 멀지 않았다는 디디의 말에 ‘나는 어느날 장님이 되었소. 언제 그랬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라는 대사를 내뱉으며 디디의 기억을 혼란스럽게 한다. 디디의 오랜 친구 고고는 이곳을 오지 않았다며 디디에게 짜증을 낸다.

내일은 꼭 튼튼한 끈을 가져오자고 다짐하는 에스트라공

(고고)와 블라디미르(디디). (산울림 극단 제공)

이 과정에서 디디는 자신의 기억을 의심한다. 이는 자신이 어디 존재하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모든 것은 사실인가에 대한 고뇌를 한다. 우리는 이렇게 끊임없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삶에 대해 고민한다. 우리가 찾아 헤매는 진짜는 무엇일까.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로 존재하는 것인가. 극을 집중해서 볼수록 마주하는 불편한 사실들과 혼란스러운 기억의 오류는 관객들의 철학적 사유를 한껏 부각시킨다.

185분의 긴 공연이지만 오랜 시간 공연되며 관객들에게 사랑받아온 이 작품의 매력은 화려한 조명이나 무대 장치 때문이 아니다. 바로 주인공 두 배우의 완벽한 결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의미 없는 말장난을 익살스럽게 소화해내는 에스트라공 역할의 박상종 배우, 그리고 그 옆에서 에스트라공의 대사를 받아주는 블라디미르의 김정호 배우.

두 사람의 호흡이 공간을 가득 메우며 이유 없는 말장난과 철학적 담론을 담은 대사들 사이의 간극을 조절해낸다. 끝나지 않은 긴 기다림에 울분을 토해내는 김정호의 연기는 과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감정들로 공간에 작은 울림을 주며 그 울림을 통해 관객의 마음에 큰 파동으로 다가오도록 전달한다. 배우들의 연륜이 물씬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어느덧 산울림 극단은1969년 국내 초연 이래 49년 째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극 속 고고와 디디는 50년 동안 고도를 기다렸다고 말한다. 마침 내년이 되면 이 작품도 50주년을 맞이한다. 50년의 세월을 거쳐 고도를 기다린 극단과 배우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고도를 맞이하게 될까 그때의 고고와 디디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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