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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49)] 빌리 브란트,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 폐기하다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7.27 09:10 의견 0

사민당은 1959년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하였다. 이 해 3월 사민당은 헤르베르트 베너(Herbert Wehner)가 중심이 되어 작성한 사민당의 독일 통일방안(Deutschlandplan)을 발표하였다.

이는 중부 유럽에 미국과 소련이 보장하는 비무장, 비핵지대 설치를 전제로 전독일회의(Die gesamtdeutsche Konferenz)-전독일 의회평의회(gesamtdeutscher parlamentarischer Rat)-제헌의회(verfassunggebenden Nationalversammlung)에 의한 전체 독일의 헌법 제정과 이 헌법에 따른 통일 독일 정부 구성이라는 3단계 통일 방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중립화를 전제로 국가연합(Konföderation)을 거치는 통일방안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평화 공세를 펴는 한편으로 1956년 헝가리와 폴란드의 시민 봉기에 개입하여 무력으로 진압하였으며, 권력투쟁 끝에 권력을 장악한 소련의 후르쇼프가 1958년 11월 다음과 같은 내용의 베를린 최후통첩을 발표하였다.

 

- 서베를린과 동베를린을 통합하여 동독에 귀속시킨다.

- 서베를린 시민의 재산권과 자유를 존중하기 위하여 베를린을 자치권을 가진 자유도시로 만들며, 동·서독 모두 이 자유도시에 대해 개입하지 않는다.

- 소련은 향후 6개월간 서방 점령국 3국의 서베를린?서독 지역 간의 군사적 수송을 현 상태로 둘 것이다. 이 기간 중 모든 당사자들이 베를린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과가 없다면 소련과 동독이 협약을 통해 준비된 조치를 취할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8년 4강국과 동서독이 옵저버로 참석한 제네바 외무부장관 회담이 열렸지만 성과를 도출하지 못했다. 사실 이는 후르쇼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내놓은 소련의 서방 시험 정책이었다. 이런 위기 고조 속에 사민당이 내놓은 정책안이 바로 앞에서 언급한 비핵지대 설치 법안과 연계된 1959년 3월의 독일통일 방안이었다.

그러나 동서 양진영 간의 접촉이 성과 없이 끝나고 베를린의 위기가 고조되어 1961년 소련과 동독은 베를린 장벽을 세워 베를린 봉쇄에 나섰다. 이는 결과적으로 사민당으로 하여금 중립화 통일방안이 허망한 몽상이었음을 알려준 최후통첩이었다.

그리고 베너,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와 함께 사민당의 3두 마차 중 한 사람으로 콘라드 아데나워의 노선인 ‘대서양주의자’, ‘힘의 우위 정책’과 서독의 서방 통합 지지자이며 사민당의 떠오르는 스타 빌리 브란트는 사민당의 독일계획을 거부했다.

이런 사정 속에 그 해 11월 사민당은 집권을 목표로 마르크스주의를 청산하고 국내 정치적으로 서독의 기본법 준수와 경제정책에서 계획경제 대신 ‘가능한 만큼의 경쟁, 필요한 만큼의 계획’이라는 명제 하의 사회적 시장경제를 받아들인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채택하였다. 결국 베너는 1960년 6월 30일 연방의회에서 독일정책을 폐기하고 사민당이 적극적으로 서방통합을 추진하며 동방정책에서 기민련과 공조하겠다고 선언하였다.

1960년 11월 하노버 당대회에서 총리후보로 선출된 브란트 베를린 시장은 이보다 더 나갔다. 그는 서독군의 핵무장에 반대하지만 1958년의 반핵시위와 같은 ‘반핵투쟁’ 식 접근방식에도 반대한다고 자기 입장을 밝혔다. 아데나워 정부의 외교정책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서독은 나토의 보호를 필요로 하며 회원국으로서 의무를 다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베너는 이 당대회에서 나토가 유럽평화의 보증인임을 인정하고 자유선거가 독일통일의 첫걸음임을 수용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1953년 런던 채무회의와 아데나워의 유일대표권 주장 시 서방 3강국이 인정한 독일 국가의 계속성에 관한 사민당의 입장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는 동독의 국가성 인정과 유일대표권, 국적법, 폴란드 체코와의 독일 동부 국경 등 현실적 문제와 특히 유럽 중부에 강국 독일의 등장으로 인한 유럽평화 문제와 직결되는 문제였다.

이런 맥락에서 사민당은 재통일(Wiedervereinigung)이란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변함없이 통합(Einheit)이란 용어를 사용하였다. 재통일이란 1937년 이전 상태로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아데나워의 발언 등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소련과의 외교관계 정상화에서도 이는 잠정적이라고 밝혔다.

사민당의 이런 입장은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에도 변함없이 유지된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이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이후 통일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채택된 베를린 선언이나 베를린 강령에서 특히 민족문제는 전체로서 유럽의 평화질서 속에서 극복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리고 국경과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점령 4강국이 최종결정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면서 피해갔다.

이런 불분명한 입장은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 등 동방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시에 현실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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