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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는 독일 통일(64)] 10개 조의 동서독 기본조약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8.28 09:55 | 최종 수정 2019.11.20 14:04 의견 0

동서독 기본조약은 10개 조 모두 “독일연방공화국(Buderepublik Deutschland)과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은…” 이라고 양국의 정식 국호를 사용하고 있으며, 주권 존중과 영토 보전 존중을 통하여 서독은 동독의 국가적 실체를 인정하고 있다.

소련이나 동독이 주장해온 동독의 외교적 승인을 수용한 것이다. 영토 보전과 함께 현존 경계선의 불가침성과 현재 및 장래에 국경선의 존중 내용은 모스크바조약 및 바르샤바조약 내용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분단 현실 인정에서 한 걸음 더 나가서 동독에 대한 사실상 국가 승인이다.

다만 울브리히트의 초안에서는 “양국이 외교관계에서 베를린과 본에 각기 대사관을 둔다”고 한 것에 비하여 최종안에서는 “상주 대표부를 둔다”고 규정하여 국가 간의 외교관계 수립은 피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10조에 “이 조약은 비준을 거쳐야 하며 비준각서를 교환한 날로부터 효력을 발생한다”고 규정하여 주권 국가 간의 정식 조약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조약의 비준절차 이외에도 서독 의회는 1973년 6월 6일 기본법의 조약에 관한 규정에 따라 동서독 기본조약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고 동서독 정부는 이를 유엔 사무처에 기탁하여 이의 조약으로의 성격을 더했다.

전문과 25개조로 구성돼 있는 1992년 12월 13일 ‘대한민국 국무총리’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무원 총리’가 정식으로 서명한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는 ‘동서독 기본조약’과 비교할 때 형식이나 그 내용에서 훨씬 더 국제적 조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효력 발생에 관해서 동서독 기본조약이 비준을 거쳐야 한다(제10조)고 규정한 반면에 남북기본합의서는 발효에 필요한 절차를 거치도록 규정하고 있다(제25조). 당시 정부는 국무회의 의결과 관보 게재로 절차를 끝냈다. 이러한 절차는 그 합의서의 법적 성격과 규범성을 애매하게 만들었다.

1972년 11월 19일에 실시된 총선에서 사민당은 지난 번 총선보다 4.9% 증가한 당 역사상 전무후무한 최고의 득표율 48.9%을 얻었다. 여기에 자민당의 4.8%를 합하여 연립여당은 과반수를 넘는 53.7%를 얻어 신동방정책에 대한 서독 국민의 지지를 확인하였다. 의석에서 야당 기민련/기사연의 234석에 비해 연립여당이 284석(사민당 242석, 자민당 42석)을 확보하여 동서독 기본조약 비준동의에 충분한 의석을 확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72년 12월 21일 기본조약 서명이 있었다. 이 조약은 조약 본문과 추가의정서 및 서독 정부가 동독 정부에 보낸 서한으로 구성되어 있다. 추가의정서는 앞에서 언급한 그대로다. 다만 서한은 “…독일연방공화국은 이 조약이 독일 국민이 자유로운 자결권에 따라 통일을 다시 달성하는 유럽의 평화를 달성하려는 독일연방공화국의 정치적 목표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는 1970년 8월 6일 모스크바조약 조인 시에 서독 정부가 소련 정부에 보낸 내용과 같다. 당시 조약에도 이 서한이 첨부되었다. 당시와 마찬가지로 이 서한도 국내 정치용으로 보인다.

이듬해인 1973년 5월 11일 연방의회에서 동서독 기본조약 비준 동의가 있었다. 연방의회에서 비준법률안 토의는 2월 15일부터 시작되었다. 주로 동독의 국가 승인 문제, 현상유지에 대한 최종적 봉인과 국가통일 과제 등에 관한 야당의 공세가 있었으며, 표결은 찬성 268(서베를린 13표), 반대 217(서베를린 9표)로 동의안이 통과되었다.

이어서 5월 25일 연방상원을 거쳐 6월 6일 이 조약에 관한 법률이 효력을 발하면서 이 조약은 국내에서 효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유엔에 기탁됨으로써 국제조약으로서 모든 요건을 갖추고 그 효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어서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은 그 해 가을에 유엔에 동시 가입하여 국제 사회에서 명실상부하게 양국 모두 주권국가로서 권리를 행사하고 의무를 부담하게 되었다.

그리고 늦게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사회주의공화국과의 조약도 1973년 12월 11일 정식으로 조인되면서 브란트 정부의 신동방정책의 제도적 틀이 완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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