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小說-대‘한심(寒心)’국] 28편: 기자회견 준비

조인 작가 승인 2020.07.19 23:15 의견 0

“그래서? 내가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고?” 
“네. 어쩔 수 없습니다. 저희가 준비하겠습니다. 그대로만 하시면 됩니다.” 
“뭐, 이렇게 귀찮게 만들어. 일 처리를 어떻게 해서?” 
“죄송합니다만, 이번에는 회장님께서 직접 나서야 하실 거 같습니다.”

측근들 또한 총회장을 앞세우고 싶지 않았다. 이미, 기력이 다하고 총명을 다한 교주는 상징적인 의미 외에는 일반 노인에 불과했다. 이해력도 떨어지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어려워해서 지금 별장에 와 있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면 흔들리는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를 세는 게 유일한 즐거움인 총회장에게 기대할 게 전혀 없었다.

“지난번 발표가 좋지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했습니까? ‘우리가 다 잘못했으니 잡아가십시오.’라고 해야 했습니까?” 
“그건 아니라도 우리가 가장 큰 피해자라고 소리치다 보니, 옥죄여 오지 않습니까? 서울시도 그렇고, 경기도도 그렇고, 덩달아 울산까지. 이러다가 우리 망하겠어요.” 
“총회장님이 나서야 하실 땐 거 같습니다.” 
“그걸 왜 모르겠습니까? 그런데, 불안해서 말이죠. 말귀도 제대로 못 알아들으시는데.”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바로 이 상황이다. 신천지는 전국적인 지탄에 대응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내부에서도 분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원래 역사적으로 절대적 권력을 가진 일인자 아래에는 제대로 된 후계자나 이인자가 존재하기 어려운 법이다. 특히, 일인자가 갑작스럽게 유고할 경우 조직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한국의 역사만 해도 그렇다. 이승만이 무너지자 자유당 정권은 외부의 저항에 대응할 힘도 응집력도 없었다. 이후 박정희도 부하의 탄환에 18년 독재에 종지부를 찍었을 때도 그를 제대로 계승할 이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 다 내부적인 경쟁이 심해서 외부 상황을 적절히 판별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다. 

수년 전부터 총회장의 사리 분별 능력이 떨어지면서, 젊은 시절에 사람들을 농락하던 마력도 사라졌다. 최근에는 전하는 메시지가 현실성이 떨어져서 젊은 세대들한테는 전혀 먹히지 않고 오히려 비판적인 피드백이 올라오기까지 했다.

그래서 측근들이 세운 전략이 최대한 접촉을 하지 않는 ‘신비주의 전략’이었다. 이 방법만이 조직 유지에 도움도 되고, 자신들의 보위에 혜택이 됐다. 이미, 총회장의 콩고물에의 단맛에 익숙해진 몸과 정신은 새로운 타계 책을 생각할 수 있는 머리를 허락하지 않았다. 

외부에서는 교주, 사탄, 사기꾼 등이라 욕하고 능구렁이 같은 수완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돈을 흥청망청 쓸 것으로 추측했지만, 총회장은 그저 건강한 노인에 불과했다. 그나마 건강했기에 기자회견장에 총회장을 세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상황이었다.

“총회장님 제가 말씀드린 대로만 하시면, 큰 문제 없습니다. 그리고 20분이 지나면, 기자회견을 무조건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건 다 이해하겠는데, 내가 사과 절을 한다는 게 마음에 걸리는구먼.” 
“크게 연연하지 마십시오. 총회장님을 뵙는 것도 영광인데, 큰절 올리는 모습까지 사람들이 보면, 우리를 비난하던 무리도 탄복할 것입니다. 예수님 겸손히 십자가에 달리신 상황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 정도로 힘든 상황인가?” 
“네. 적들의 음모와 저항이 너무 강력합니다. 저희 믿음만으로 견뎌내기가 힘듭니다. 총회장님의 보살핌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혹시나 총회장이 기자회견에 응하지 않겠다고 변덕을 부리거나, 계획했던 큰절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 큰 낭패가 되기 때문에 측근들은 온갖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해서 총회장의 마음을 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예수도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 세상 구원을 위해서. 내가 세상 앞에 큰 절 못할 이유가 없다. 내가 업드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면, 백 번이라도 절하리라.’

서울에 한 유명한 대형 교회의 목사는 설교도 잘하고, 교권을 휘어잡는 출중한 능력이 있었다. 수만 명이 넘는 교회를 운영하면서도 단 한 번도 구설(口舌)에 휘말린 적이 없었는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목사의 여성 편력이 문제가 될 것임을. 

결국, 목사는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여성의 고발에 그동안 이뤄 놓은 모든 걸 내려놓게 됐다. 이쯤 되면, 기도하면서 자신의 과오(過誤)를 뒤돌아보고 회개할 만도 한데,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다.

‘도대체 뭐가 문제인가?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좋은 만남을 베푸는데? 내가 돈을 바랐나? 아니면, 명예를 원했나? 단지, 그들의 미천한 몸만 어루만진 것뿐인데. 그리고 그들도 그 순간에는 즐기지 않았던가? 나를 연모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간이 이성을 잃기 시작하면, 자기 잘못도 정당화되는 법이다. 특히, 영웅이라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를 역사, 종교, 신 등을 동원해서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합리화하기 마련이다. 수천만 명을 죽인 히틀러나 스탈린, 마오쩌둥, 나폴레옹 등이 그들의 잘못을 알까? 그들은 모두 정의와 국가를 위해서 살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다. 하물며, 우주를 창조한 신을 배경으로 둔 목사가 그의 여성 편력에 죄책감을 느낄까?

원래 잘못을 제일 잘 뉘우칠 때는 아이 때다. 부모의 돌봄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절. 그때는 부모의 성난 얼굴만 봐도 울면서 잘못했다고 두 손을 싹싹 빌면서 용서를 구한다. 그러다가 머리가 커지면, 부당한 꾸중과 지적(指摘)에 고개를 들고, 좀 더 크면 아예 꾸지람을 거부하면서 역으로 부모의 합리적이지 못한 태도를 비판한다. 

그리고 어느 정도 성공해서 권력과 부를 거머쥐게 되면, 스스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자처하고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의 상태에 이르렀다고 착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하는 일꾼의 허물을 용서해 주십니다. 저 위대한 왕 다윗을 보십시오. 그가 밧세바를 간음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녀가 여성을 좋아한다고 해서 버리지 않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위기에 몰린 목사의 설교가 설득력이 있었나 보다. 그는 퇴임할 때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는데 그 목사는 너무 어린 여성에 관심 뒀던 게 탈이었다. 둘의 차이는 단 하나다. 퇴임까지 버틴 목사는 그를 고소하려 했던 여성의 입을 막을 수 있었고, 여러 정황을 고려할 때 목사가 강제로 요구한 게 아닐 수도 있다는 판단도 가능했다. 

하지만, 쫓겨나야 했던 목사는 그 관계의 부적절한 정도를 봤을 때, 여성이 자발적으로 응했다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나이 차이가 났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고, 나이 차이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지만, 여성이 목사와의 관계는 사랑이 아니라 강제와 폭력이었음을 고백하니 아무리 목사가 우겨도 소용없었다. 그리고 목사는 그의 자만으로 여성의 고소를 그대로 방치하기까지 했다. 

“신중하게 준비하셔야 해요.” 
“알고 있어요. 실수 없이 할 거예요.” 
“참 걱정입니다. 아무리 옆에 붙어서 말씀하셔도 잘 못 알아들으실 수도 있으니, 사전에 잘 체크하세요.”
  (계속)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