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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1주년 추념(3)] 제주도 4.3 유적지 순례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4.03 12:52 | 최종 수정 2019.07.15 14:43 의견 0

<4.3평화재단>은 5개의 순례길을 만들어 아픈 역사를 보존하고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보통은 치유와 휴양을 위한 관광지로 제주를 찾게 되지만, 제주를 방문한다면 제주에서 벌어졌던 참극과 슬픔의 현장을 되돌아보며 평화의 섬 제주를 염원해보는 것도 뜻깊을 것입니다.

▲ 5개의 제주 4.3길이 조성된 지도 ⓒ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

(1) 조천 북촌마을

이곳은 토벌대가 마을주민 300여명을 대학살한 곳으로 4.3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은 곳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이 은신처로 삼았던 <몬주기알>과 <마당궤>, 무장대와 토벌대가 격돌했던 <북촌포구>와 <꿩동산>, 거대한 학살이 펼쳐졌던 <당팟>과 <낸시빌레>까지 두 시간 정도 걸으며 모두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당팟>은 북촌대학살의 1차 학살지가 되었던 곳으로 약 100 여명의 시민이 학살당했던 장소입니다.

또한 <북촌초등학교>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규모 민간인학살이 자행된 공간입니다. 북촌리에 있던 불가항력의 남녀노소 400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희생되었으며 마을의 집들도 다섯 채만 남기고 모두 불태워졌습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북촌 주민들이 밭일을 하다가 돌아올 때 쉬어가던 넓은 팡 <너분숭이>에 작은 기념관을 짓고, 역사를 보존하고 있습니다.

<너분숭이>의 애기무덤은 당시 죽임을 당한 어린아이와 무연고자 등의 시신을 매장한 곳이지요. 애기무덤 20여기가 군락을 형성해 있어 참혹했던 북촌대학살을 고발내고 있습니다. 당시 상태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당시의 무모한 학살을 드러내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 너분숭이 4.3 기념관. 북촌리는 4.3당시 450여명의 주민이 토벌대에 학살된 곳으로 제주도에서 가장 피해가 큰 마을이다. ⓒ 제주 4.3평화재단 홈페이지

(2) 표선 가시마을

<가시리>는 한라산 남동쪽 해발 90~570m에 위치한 중산간마을입니다. 13개의 오름이 있으며, 넓은 초원과 임야가 펼쳐져 있어 전통적으로 목축이 성행했습니다. 1948년에는 집이 360여 개 있을 정도로 큰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토벌대의 초토화 작전으로 마을은 폐허가 되었죠.

<고야동산>은 4.3 당시 마을 청년들이 토벌대를 감시하기 위해 보초를 서던 동산입니다.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도망갔다가 붙잡힌 사람들, 도피자의 가족으로 간주된 사람들은 표선리의 <한모살>과 <버들못>에서 군인들에게 집단총살을 당했습니다. 특히 <종서물>과 <새가름>을 합쳐 총 30여 가구가 전부 불타 없어졌으며 100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하며 잃어버린 마을이 되었습니다.

▲ 한모살. 한모살은 '당캐, 표선 백사장' 등으로도 불리며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바닷가이다. 이곳에서는 대량의 학살이 이루어졌다. ⓒ 제주 4.3 평화재단 홈페이지

(3) 남원 의귀마을

<의귀마을>은 남원읍 중산간에 위치한 마을입니다.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던 1948년 11월, 타지역보다 일찍 강경 진압작전이 있었던 마을입니다. 주민들은 집을 잃어버리고 인근 오름이나 숲, 궤 등에 숨어살거나 산으로 피신했습니다. 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했으며, 아직도 대다수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고 있습니다.

<의귀초등학교>는 4.3사건이 살아 숨 쉬는 역사적 현장입니다. 1948년 12월부터 육군이 주둔했으며 49년 1월에는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군인들은 <의귀초등학교>에 수용 중이던 80명의 민간인을 학살했습니다. 실제로 <의귀초등학교> 인근에는 학살당한 80명의 주민을 묻은 합장묘가 있습니다. 또 <송령이 골>에는 <의귀초등학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사망한 토벌대의 시신이 매장되어 있습니다.

또한 토벌대가 무장대를 무찌를 목적으로 세운 <민오름 주둔소>와, 토벌대의 강경진압을 피해 주민들이 숨어있던 <영궤>가 있습니다. <영궤>는 북촌리의 <마당궤>와 달리 입구가 넓어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임시적으로 피신한 곳이었다고 합니다.

▲ 송령이 골. 1949년 1월 12일 의귀국민학교 교전에서 마당한 무장대의 시신이 집단매장된 곳이다. ⓒ제주 4.3평화재단 홈페이지

(4) 안덕 동광마을

<동광마을>은 19세기부터 농민들이 생존권을 위해 민란을 일으켰던 마을입니다. 해방이후 미군정이 일제강점기와 다름이 없는 수준으로 수탈을 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원성이 자자했죠. 마을을 방문한 관료를 동광마을 청년들이 폭행하는 ‘성출반대사건’이 발생하면서 미군정의 감시를 받게 됩니다. 4.3 당시 동광리에는 약 200호가 모인 커다란 마을이었으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며 많은 주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무등이왓마을>은 동광리 5개 마을 중 가장 큰 마을로 130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제 때 수탈을, 4.3사건 직전에는 보리공출을 겪었습니다. 1948년 11월에는 소개령을 전달받지 못한 주민들이 구타와 총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군인들은 매복해 있다가 시신을 수습하러 온 사람들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동광리 주민들이 집단으로 피난생활을 했던 <큰넓궤>와 <도엣궤>가 있습니다. 주민들의 생활용구 흔적도 남겨져 있어 당시 급박했던 모습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 동광리의 큰넓궤와 도엣궤는 동광목장 안에 있는 용암동굴로 1948년 11월 이후 주민들이 토벌대를 피해 2개월 가량 집단적으로 은신생활을 했던 곳이다. ⓒ제주4.3평화재단 홈페이지

(5) 한림 금악마을

금악리는 <금오름>을 중심으로 <새미소오름>, <은오름>, <누운오름>, <정물오름>, <정물알오름>, <도너리오름>, <문도지오름>, <선소오름>이 마을을 감싸고 있습니다. 작은 샘과 하천이 많아 예부터 밭농사와 목축이 성행했던 부자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심한 착취로 가난해졌으며 1946년에 콜레라가 발생하여 이웃 간의 왕래가 금지된 적도 있었습니다.

4.3을 겪으면서 주민들은 <개역빌레궤>, <밥쉐물>, <금오름>, <알곳> 등으로 피신했으며 마을은 붕괴되었습니다. 무장대는 마을의 주민들을 납치하고 학살했으며 우익인사 집을 불태웠습니다. 경찰은 마을을 기습해 무장대와 관련 있다고 간주하며 마을의 노약자들을 연행해갔습니다. 이때 노약자들이 빨리 걷지 못한다는 이유로 <오자교>와 그 인근에서 학살을 자행하기도 했습니다.

43년 11월 소개령 후 300여 가옥이 없어지고 152명의 주민이 학살 되거나 행방불명되었습니다. <웃동네>, <중가름>, <오소록이동네>, <별드르>, <별진밭>, <새가름>, <동가름> 등의 마을은 복구되지 못한 채 잃어버린 마을로 남게 되었습니다.

▲ 금오름의 모습. 4.3 당시 주민들은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했는데, 이곳에서 망을 보다가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 깃발을 흔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다. ⓒ위키백과

<금오름>은 제주 서부지역 전체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당시 수많은 진지 동굴이 만들어졌던 곳입니다. 4.3 당시 주민들은 이곳에서 피난생활을 했는데, 이곳에서 망을 보다가 경찰이 마을로 다가오면 붉은 깃발을, 떠나가면 하얀 깃발을 흔들어 마을 사람들에게 알리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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