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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리더십(2)] (Case-1. 사례편) “부하직원의 사표를 받아오세요!” - 중간관리자로서 받은 첫 임무의 충격

윤준식 기자 승인 2021.04.18 22:49 | 최종 수정 2021.05.06 10:53 의견 0

“위기 부장, A지점의 김부하 씨에게서 사표를 받아오세요!”

상무님 말씀에 순간 나의 귀를 의심했다. 인수인계도 마치지 않은 상황에서 지시받은 나의 첫 업무가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부하 직원을 자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보업무로 잠시 일하던 회사와의 계약이 해지될 즈음이었다. 새 직장을 구하려던 차, 마침 중간관리자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됐다. 이런저런 모임에서 마주치며 흠모하게 된 사장님이 이끌고 있는 회사다. 연봉이 높은 것은 아니었지만 좋은 사장님 밑에서 새로운 영역의 일을 배우며 성장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새로운 영역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점, 리더십을 키울 수 있다는 기대감은 묘한 흥분을 불러왔다.

그러나 막상 입사하고 나니 뭔가 달랐다. 전반적으로 회사의 분위기가 어두웠다. 첫 출근 날 제대로 인사를 나눌 수 있었던 건 임원분들 뿐이었다. 좋은 인상을 남기려 힘차게 자기소개를 하며 시작하고 싶었지만 직원들은 각자 자기 일에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바빠서 그랬다고 하기엔 뭔가 위화감이 있었다.

내 자신이 경력직인데도 첫날부터 어리버리해졌다. 여기서 어떻게 적응해야 할 것인가? 나 자신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벅찬 하루였다. 대체 내 업무는 무엇인가? 내 업무는 누가 정해주고 지시해주나? 인수인계자는 어디에 있나?

나 자신이 홀대받거나 테스트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업무에 대한 자세나 열정을 보이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하고 당장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야겠다고 스스로를 다잡았던 것이다. 입사 후 3일이 지나서야 전임 부장으로부터 업무를 하나씩 넘겨받을 기회가 생겼다.

그것도 잠시뿐, 느닷없이 A지점에서 전임 부장에게 긴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A지점이 입주한 건물에 심각한 하자가 발생해 지점업무를 진행할 수 없다는 연락이었다.

최근 폭설에 이어 맹추위가 계속된 날씨가 문제였다. 건물에 틈이 발생했고, 옥상에 쌓인 눈이 녹았다 얼었다 하면서 건물 내로 스며들었던 것이다. 이것이 동파의 원인을 제공했던 것이다. 흘러내린 물이 천정 석면 슬레이트에 고였는데, 그 무게와 습기를 이기지 못한 슬레이트가 부서지면서 옥상에서 천정까지 이어진 틈새에 있던 엄청난 양의 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지점 업무는 당장에 정지되어 버렸고, 멘붕 상태의 관리담당자가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 사태의 심각성을 알려온 것이다.

전임자와 나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도착 시점에서 해당 지점은 초토화나 다름없었다.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데 전임 부장은 건물주를 수배하기 시작했고, 나는 물을 퍼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관리담당자였다. 갑자기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달아나버린 것이다. 이게 문제가 되었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이사님이 호출하셨다. 어제 저녁 전화로 전임 부장의 보고를 받았다며, A지점의 관리담당자 김부하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김부하씨는 이전에도 업무에 불성실했으며 본사의 지시에 대해서도 불손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그래서 이번 일을 겪으며 더 이상 이 직원을 그대로 둘 수 없다며 사직서를 받아오라는 지시를 나에게 내린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런 지시 자체가 문제다. 회사가 직원으로 하여금 의원면직(依願免職)하도록 시킨다는 내용인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직원 스스로 의원면직을 선택할 만큼 잘잘못에 대한 근거가 명확해야 하며, 면직 이후의 처우와 퇴사절차 진행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필요했다.

이사님의 설명 수준이라면 김부하씨는 징계해고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어서일 것이다. 이제 출근한지 사나흘된, 게다가 인사권 없는 신임 부장이 나설 일은 절대 아닌 것이다.

이사님의 업무지시는 일방적이었다. 그가 나에게 지시할 때는 거부할 수 없는 합리적인 근거와 이유가 있었다. 내 입장에선 나의 업무가 아니라고 항변할 수조차 없었다. 어제의 일 수습에서 보인 나의 역량이 공교롭게도 심지가 거의 다 타들어간 폭탄을 떠앉는 결과로 돌아왔다.

대체 이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새는 건지, 회의실에서 나온 나를 둘러싸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게 신기했다. 어디다 도청기라도 숨겨둔 걸까? 덕분에 A지점으로 김부하씨를 찾아가기 전, 본사 직원 몇몇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여기도 일종의 블랙기업이었다. 다들 저임금구조에서야 돌아가는 매출구조로 인해 종업원들의 사기, 회사에 대한 충성심이 낮을 수밖에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는 다른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다. 여기저기 전전하며 만들어진 불완전한 경력사항 때문에 2년 정도의 근속기록이 필요했고, 사장님의 풍모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며 여기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이곳에 온 것 자체가 인생의 함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날로 A지점의 김부하씨를 만나 사직서를 작성시키고 서명까지 받아 사무실로 복귀했다. 사직서를 받아들고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사님의 시선을 뒤로하고 내 자리에 앉아 김부하씨를 위해 기도했다. 부디 잘 가라고... 새 출발 잘 하라고...

나의 행동은 다른 직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김부하씨의 성향과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그에게도 어느 정도의 잘못이 있지만, 본사의 지점 직원 관리문제도 심각했다. 우선 김부하씨를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김부하씨를 책임지는 관리자 입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나서서 김부하씨를 해고하는 일이 아니다. 잘못한 점은 꾸짖은 다음에 회사의 입장을 전해야 한다. 본인이 원하면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회사와 직원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해야하는게 중간관리자로서의 도리다.

A지점을 찾아가 김부하씨를 만나 1시간 가량 웃고 떠들며 대화했다. 대화 마지막에 김부하씨가 나에게 말했다. “위기 부장님, 솔직히 말씀하세요. 저에게 사표 받으러 오셨죠?” 나는 어떻게 알았냐고 물었다. “부장님 얼굴에 다 써 있어요.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얼굴에 다 드러나는 부장님은 처음이네요. 저는 괜찮으니까 퇴사에 대해 안내해주세요.” 그의 밝은 목소리가 내 마음에는 아프게 들려왔다.

나의 첫 임무는 그렇게 성공리에 끝났다. 그리고 안타까운 것은 그 후로 서너명의 부하직원의 사직서를 받으러 다녀야 했다. 그게 내가 그 회사에서 중간관리자로서 했던 초기 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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