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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31)] 지지기반이 약한 흥선대원군, 경복궁 중건으로 실각하다(상편)

이동진 선생님에게 듣는 경복궁 이야기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1.22 21:59 의견 0


지금까지 송군호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흥선대원군을 중심으로 경복궁 중건의 과정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조선의 국운이 다했기 때문인지, 무리한 경복궁 중건이 원인이 된 것인지 경복궁 중건 이후의 조선은 빠른 속도로 쇠락하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부천의 마을도서관을 중심으로 인문학과 역사를 가르치고 계시는 이동진 선생님을 찾아 경복궁 중건과 조선의 몰락에 대한 해설을 요청했다.


이동진 선생님(이하 이): 경복궁 중건으로 흥선대원군은 백성들과 사대부의 지지를 잃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원래의 경복궁보다 훨씬 큰 규모의 궁궐로 설계했습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수많은 백성들의 땀이 들어가죠. 백성들도 처음에는 자발적이고 긍정적인 마음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강제노역으로 변질되고, 서민들은 자신의 생계조차 챙기지 못한 채 부역을 해내야 했기 때문에 불만이 점점 커져갑니다.

여기에 당백전까지 발행되면서 상상을 초월하는 물가상승을 경험하게 됩니다. 서민들의 고통과 부담은 더욱 커지고 삶을 이어가기 어려운 지경에 이릅니다. 백성들 사이에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원망의 목소리가 더욱 커져만 갑니다.

또한 양반들 사이에서도 여론이 악화됩니다. 집권 초기 서원 철폐 등 양반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정책들로 양반들의 반감을 샀던 흥선대원군은 양반들의 사유지에 있던 나무들을 함부로 베어가면서 경복궁 중건에 부족한 나무들을 조달했습니다. 특히 양반들의 무덤가에 있던 나무들을 베어갔는데, 이는 양반들이 자신의 조상 묘처럼 소중하게 여기던 것이었습니다. 이에 양반들은 많은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은 당시 상황을 고려하지 못하고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는데만 목적을 둔 흥선대원군의 잘못된 정책으로 볼 수 있다. 왕실에 우호적이던 사대부들도 등을 돌리고흥선대원군을 응원하던 백성들도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 운현궁에서 전해져오는 흥선대원군 초상화 ⓒ(문화재청 제공)

이: 정권을 유지하는 과정에서도 흥선대원군의 지지기반이 약했기 때문에 하야를 요구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은 직후부터 친족을 관직에서 배제합니다. 친족이 정권에 참여하면 폐단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안동 김씨, 풍양 조씨처럼 특정 가문이 조선 역사 250년간 집권해왔기 때문에 남인, 소론 등 다양한 세력이 정계에서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권력의 저변에 있던 남인, 소론 등을 중앙으로 불러냅니다. 가문과 세력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을 관직에 등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히죠. 또한 반역지역으로 몰려 관직에 오를 수 없었던 서북지역의 일부 세력과 무인을 중용합니다.

이 집단들은 그 당시 기득권 세력이 아니라 권력의 변두리에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쉽지 않았던 거예요. 결국 지지기반이 약한 흥선대원군은 후반부로 가면서 백성의 신임을 잃으면서 정치적 기반이 크게 흔들리게 됩니다.

흥선대원군은 사색당파를 가지리 않고 인재를 등용한다. 노론계 인사와 소론계 인사를 필두로 남인과 북인계 인사들까지 모두 정계로 불러들인다. 그러나 남인과 북인을 등용하면서 노론과 소론의 반발을 얻는다. 또한 민씨세력과 손을 잡고 정게를 이끌어가는데, 이 사건이 이후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조선 정계의 심각한 폐단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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