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메뉴

칼 융이 말하는 페르소나와 그림자 (下)

[무의식과 트렌드] 페르소나가 상품이 되는 시대④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6.19 15:49 | 최종 수정 2019.07.04 03:23 의견 0

앞에서 살펴보았듯, 그림자와 페르소나는 양날의 검처럼 동시에 존재하지만,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는 둘의 화해가 꼭 필요합니다. 그런데 과연 이 둘은 과연 화해할 수 있을까요

¶그림자와 페르소나, 화해할 수 있을까

우선 자신의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명확하게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먼저 내가 가진 가면이 어떤 속성을 지녔는지, 내가 경험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어떤 차이를 지녔는지를 의식적으로 찾아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비디오로 촬영된 내 모습을 보고 ‘이게 진짜 나야’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내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행동들이 은연중에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죠. ‘이게 나야!’라고 확신을 가지고 보여준 모습이 내 모습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림자를 인식하는 방법으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그림자를 가면으로 만들어볼 수도 있겠네요. 자신의 그림자를 객관화 시켜서 의식해보자는 것이죠. 융도 자신의 저서인 <레드북>을 통해서 자신의 그림자를 표현했는데 도둑처럼 교활하며 멋있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융은 평소 영국 스타일로 옷을 입었으며 대외적으로도 과학자이자 의사로 훌륭한 인물로 여겨졌는데 말이죠. 그는 <레드북>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그림자를 인식했습니다.

변화는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그림자를 면밀히 들여다보고 자신의 일부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림자로 인해 발생한 문제에 책임을 진다면 둘이 화해를 하는 과정은 조금 더 빨라질 수 있죠.


¶자신의 그림자를 발견했다면, 인정해야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실수를 하고 난 뒤에 자신의 일을 돌아보고 그림자를 발견합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피해를 입은 사람을 찾아가 자신의 그림자가 일으킨 행동과 태도를 실토하고, 이로 인해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것을 인정한 후 미안하다 사과하는 행위가 매우 중요합니다. 상대에게 사과와 배상을 함으로써 자신의 그림자를 명확히 인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림자와 페르소나를 하나로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수용’입니다. 자기 수용은 자신이 가치 있는 인간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수용이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신을 고찰하고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며 모든 것을 내 삶과 역사의 일부로 여긴다는 뜻이죠. 이렇게 자기 수용이 일어나고 나면 페르소나를 넘어선 진정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융은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화해의 수단으로 ‘꿈’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융의 영혼의 지도>를 저술한 머리 스타인은 꿈속에서 옷을 입거나 벗는 것, 갈아입는 것은 페르소나와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옷을 갈아입는 경우, 다른 페르소나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하며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보일 땐 페르소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머리 스타인의 내담자 중에는 사람들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모습을 노출하는 꿈을 지속적으로 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나체로 있는 자신, 어떤 겉치레도 없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자기 수용이라고 봤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모습을 말하죠.


¶수치심을 이겨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라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 ‘수치심’입니다.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자신을 폄하하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남들과 비교했을 때 현저히 부족한 자신의 모습에서 수치심을 느끼고,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페르소나를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는 충족감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계속해서 페르소나를 만들어냅니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지 못해 극단적인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고, 뚱뚱하지 않아도 자신을 계속 뚱뚱하다고 생각하며 거식증을 유발하기도 합니다. 페르소나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과정이 중요하죠.

사람은 표면적으로만 드러나는 게 전부인 어떤 누군가가 아니라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가능성을 지닌 무언가 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처리할 때 일부는 의식적으로 처리하기도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처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누구일까요 무엇일까요 이런 의문을 품지만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그 모든 것을 다 합쳐야 비로소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융은 ‘우리의 무의식은 빛으로 반짝이고 창의적이며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다. 우리가 무의식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내면의 안내자가 되어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림자 역시 무의식의 일부입니다. 그림자는 안좋은 것이 아니라 무궁무진한 창의적 에너지를 지닌 것이죠. 둘의 결합을 통해 우리는 완전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림자, 페르소나에 갇혀 상대를 잘못 볼 수도 있다

융은 개인의 신성함 각 개인이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진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강조했습니다. 사람의 내면은 중심과 주변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 모두 주변에 속하는 존재이며 중심은 내면에 있는 개인의 신성함입니다. 어느 쪽에 치우쳐서 스스로를 잃지 않고 페르소나와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죠.

그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이 변화할 수 있겠죠. 우리는 누군가를 처음 볼 때 특정 집단으로 분류한 뒤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그들을 조금씩 다르게 평가합니다. 예를 들어 명품을 걸친 한 남성이 지나간다고 봅시다. 그러면 그를 ‘잘 사는 집단’으로 분류하거나 ‘허세가 많은 집단’으로 분류할 수도 있겠죠.

이렇게 구분한 집단을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따라 개인을 평가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잘사는 집단으로 분류했다면 그를 호감 있게 바라볼 수 있겠죠. 하지만 허세가 많은 집단으로 분류했다면 고깝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이런 반응은 어떤 생각을 하지 않고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의 모습은 그사람의 전부가 아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사해서 바라봅니다. 투사를 해서 바라보는 사람의 모습이 일부 맞을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전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노력은 어느 정도의 통찰력을 가지고 내가 생각했던 상대와 그를 더 잘 알고 난 뒤의 모습 사이의 차이를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의식하고 변화하려난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을 개선하는 시작점에 설 수 있습니다. 앞의 남자를 허세가 가득한 남자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이야기를 듣고 그의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전혀 다른 인상을 받을 수 있습니다. 부자가 된 이유가 자신이 부던한 노력을 한 끝에 사업체를 성공시켰을 수 있죠. 이렇게 편견 없이 개인 그대로를 보게 되고 영혼을 보게 되면 그의 참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상대를 받아들이는 능력이 커지게 됩니다. (마침)

<저작권자 ⓒ시사N라이프> 출처와 url을 동시 표기할 경우에만 재배포를 허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