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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_이야기(25)] 격변하는 동아시아 :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김혜령 기자 승인 2018.08.17 16:43 의견 0

조선에 처음으로 이양선이 출몰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입니다. 이양선(異樣船)이란 한자어 그대로 ‘이상한 모양의 배’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인근 연안에 나타난 서양의 배를 가리킵니다. 그만큼 서양세력이 끊임없이 조선의 문을 두드렸다는 방증이지요.

당시 근대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은 자신의 상품을 팔고 원료를 수입해 올 시장을 필요로 했습니다. 이들 국가들은 시장 확보를 위해서 아시아 여러 국가의 문을 두드립니다.

이미 앞서 살펴보았듯 중국은 아편 전쟁에 패배하고 강제로 서양과 교류를 시작했으며, 수도인 베이징까지 서양세력에 함락당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조선에도 중국의 상황이 알려졌습니다. 이에 조선은 문호를 열지 않고 서양과 교류하지 않겠다는 강경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처음부터 서양과의 교류를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흥선대원군은 그들의 발달한 과학기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천주교의 유일신 사상과 유교 중심 사회인 조선의 제도는 서로 충돌하는 점이 많았고 중국이 서양세력에게 패배해 무릎을 꿇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서양과의 문호를 닫고 교역을 거부하게 된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은 서양과 절대 교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굳히며 척화비(斥和碑)를 세웁니다. 척화비 이야기를 하자면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같은 서양세력과의 전쟁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 경남 양산시에 남아있는 척화비.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서양세력을 배척하고 이를 온 백성에게 일깨워 주고자 전국에 세우도록 한 비이다. 비에는 굵은 글씨로 “서양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곧 화친이니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을 적어 ⓒ문화재청 제공

병인양요는 1866년 병인박해를 빌미로 프랑스와 벌어진 전쟁입니다. 병인박해란 조선에서 세력이 점점 확장되는 천주교를 탄압하기 위해 프랑스 신부 9명과 신도 8,000명을 죽인 사건입니다. 프랑스에서는 신부 살해에 대한 질책과 함께 조선의 문호 개방을 요구합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를 침공했으나 조선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물러나게 됩니다.

이어 1868년에 오페르트 도굴사건이 발생합니다. 독일인 오페르트가 흥선대원군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파헤친 사건으로 유교가 통치사상이었던 조선에서 조상의 묘를 파헤친 것은 크나큰 죄로 여겨졌기에 불거진 사건입니다. 하물며 국왕의 조부인 남연군의 묘가 파헤쳐 졌으니 흥선대원군의 분노는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죠. 이 사건으로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에 박차를 가하게 됩니다.

신미양요는 시기상 경복궁 중건이 마무리되는 1868년 이후인 1871년에 발생한 사건이지만,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을 결단하게 한 사건이기 때문에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미양요는 1866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조선과 교역하기 위해 침략한 사건입니다.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으로 들어와 조선에게 교역을 요구합니다. 평양감사는 교역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계속적인 통상을 강압적으로 요구하자 평양감사는 제너럴 셔먼호에 불을 지릅니다. 이것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지요.


이 사건을 꼬투리 잡아 미국은 1871년에 조선을 침공합니다. 결과적으로 미국은 이 전쟁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철수합니다.

이렇게 병인양요, 오페르트 도굴사건, 신미양요의 3가지 사건을 겪은 흥선대원군은 서양세력과의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강화하지요. 그리고 그 의지를 굳건히 하고자 전국 곳곳에 척화비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통상수교 거부정책은 조선의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데 성공합니다. 서양세력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흥선대원군은 조선을 보호한 공을 크게 인정받죠. 그러나 거꾸로 조선의 근대화를 늦추는 계기가 됩니다. 빠르게 변화하는 역사의 물결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선을 격동하는 시대에 뒤처지게 만들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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