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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중해와 황하(2)] "축록자 불고토 (逐鹿者 不顧兎)"가 가져온 것

주동식 객원편집위원 승인 2018.01.18 14:18 의견 0
중국 문명에서 자주 쓰이는 말이 축록자 불고토(逐鹿者 不顧兎)이다. 사슴을 쫓는 자는 토끼 따위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사슴은 바로 중원(中原) 지역을 말한다. 중원은 황하의 중류부터 하류에 이르는 지역이다. 중원은 중국 고대문명의 출발점이자, 어마어마한 생산력을 지닌 황금의 땅이다.

 

중국 고대문명의 출발점이기 때문에 정치적 정통성과 상징성이 매우 컸다. 이 지역을 장악한 세력이 중화문명의 정통 계승자라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을 수 있었다. 중국의 패권을 다투는 영웅호걸들이 황제를 옹립하려는 노력과 함께 황하 중류의 장안과 낙양 지역을 장악하려 했던 것이 이 지역이 지닌 정치적 상징성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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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역의 생산력은 더욱 중요한 요소였다. 이 지역은 중세 이후 토지의 소금 함유량이 매우 높아지는 등 황폐화 현상이 극심해졌지만 고대에는 방대한 원시림과 함께 황하가 실어나르는 기름진 토사의 영향으로 엄청나게 비옥한 땅이었다. 이러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이 지역을 장악한 세력은 중원 문명의 패권 다툼에서 압도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중원 지역의 생산력과 그 지역을 장악한 자의 패권 경쟁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 우리가 잘 아는 삼국지의 사례이다. 조조, 유비, 손권의 지도력이나 휘하 참모들의 역량도 중요하지만 결정적으로 이들 세력이 자리잡은 지역의 생산력이 3국의 승부를 갈랐다고 봐야 한다.

 

그런 점에서 사실 삼국지의 패권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승부는 적벽대전이나 이릉대전, 오장원 대결이 아니라, 조조와 원소가 대결했던 관도대전이다. 황제를 옹립하고 장안과 낙양 등 중원의 핵심부를 장악한 조조와 하북의 패자인 원소가 중원의 진짜 주인 자리를 다투는 싸움이었고, 이 싸움이 조조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실 삼국지의 승부는 결정됐다고 봐야 한다. 나머지 내용은 후일담 정도에 가깝다. 픽션에서는 물론 다르게 묘사되지만.

 

그래서 중국의 패권을 노리는 자는 사슴(중원)을 쫓지, 다른 지역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축록자 불고토(逐鹿者 不顧兎)라는 표현이 쓰이게 된 것이다.

 

하지만 황하 중류와 하류 지역은 엄청난 생산성에도 불구하고, 매우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하(河)는 원래 황하 자체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지만 나중에 일반명사화했다. 연간 고정적으로 물길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홍수기와 갈수기에 따라 물길이 그때그때 달라지고 홍수기에는 큰 피해를 안겨주는 특성을 갖고 있는 물길을 말한다.

 

중국 고대문명에서는 이 황하의 관리, 치수가 절대적인 국가적 과제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고대의 요, 순, 우 임금들에 관한 기록을 보면 황하 치수가 당시 중원 문명에서 얼마나 절대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황하 치수 사업의 책임자였던 우 임금의 경우 심지어 집 앞을 몇 번씩이나 지나쳐도 집에 들르지 못하고 자신의 아이가 부르는데도 그냥 손짓만 했을뿐 직접 안아주지도 못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과장이 섞였다 해도 얼마나 그 사업이 절대적인 중요성을 가졌는지, 공동체 전체의 역량을 기울여야 하는 대사업이었는지는 읽을 수 있다.

 

황하 치수 사업은 당시 중원 문명의 국가적 운명을 좌우할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거대한 인력과 물자의 동원이 불가피했다. 이것은 고대부터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가 등장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된다. 또한 개인이 집단에 귀속되어 몰개성화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동아시아 문명에서 개인이라는 사회적 철학적 존재가 등장하는 것은 사실 20세기 이후라고 봐야 한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이 형성된데다, 지중해처럼 천연의 방어막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국가와 국가, 권력과 개인 사이의 관계는 고정적이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밖에 없었다. 즉, 한번 강력한 세력이 등장해 여타 지역을 장악하면 일시적으로 약탈을 하고 나서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해당 지역에 고정적으로 주둔해 상시적인 거버넌스 체계에 묶어둘 수가 있었다.

 

중원 문명이 초창기에 황화 중류 지역의 비교적 소규모 영역에서 시작했지만 이후 끊임없이 팽창을 거듭해온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개인의 토지 소유가 아닌, 공동체적 토지 소유가 기본적인 형태가 되었다는, 마르크스가 말한 아시아적 생산 양식의 특성도 여기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중원 문명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다양한 생태계와 가치를 허용하지 않는 거버넌스 체계를 만들어냈다. 이 거버넌스는 본질적으로 계약에 근거하지 않으며, 개인이란 단위가 무의미한 체제이다. 모든 가치가 민간의 영역이 아니라 공공과 정부의 영역 안으로 수렴되는 체제이다.

 

중원 문명은 그래서 국가와 국가, 사회 집단과 집단 사이에 대등한 관계라는 개념이 성립할 수가 없다. 상부와 하부, 지배와 피지배, 중심과 주변 등의 질서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이런 질서가 상호 합의와 계약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서양의 고전문학인 일리어드, 오딧세이 등을 읽어보면 거기에 평범한 일반 병사와 영웅들의 대화가 나온다. 하지만 중원 문명의 고대 문학에서 그런 흔적은 찾기 어렵다. 한마디로 이 문명에서 개인은 극히 특출한 역량을 가진 영웅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다. 그건 본질적으로 개인이 아니다.

 

중원 문명의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시스템은 단기간에 거대한 성과를 내는 데에 큰 위력을 발휘한다. 하지만, 가치의 다양성을 근원적으로 부정하고, 민간 영역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시스템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는 어렵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중원문명의 물질적 생산력이 서양 즉 지중해 문명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뒤지는 결과로 이어졌다.

 

중원 문명의 물질적 생산력이 늘 지중해 문명을 앞서왔고 그것이 역전된 것은 19~20세기 들어서의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착각이다. 로마제국의 월평균 철 생산량이 8만톤을 훌쩍 넘겼는데 비슷한 시기 중국 한나라의 철 생산량은 월 5천톤에 불과했다는 통계도 있다.

 

오히려 중원 문명이 지중해 문명을 물질적으로 앞섰던 것은 서양의 중세의 암흑시대와 세계 역사상 기적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는 송나라 때를 중심으로 한 일시적인 현상이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하다.

 

이것은 민간의 자율성의 기반에서만 가능한 다양한 시도와 자유로운 계약의 존재의 여부에서 필연적으로 유추되는 귀결이다. 거버넌스의 성격에서 중원 문명이 지중해 문명을 앞선다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중원 문명도 다양성이라는 가치가 도입될 가능성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그것은 강남 지역 즉 양쯔강 이남 지역의 개발과 나아가 중국 동부 해안지역과 한반도 및 일본 열도와의 교류 등에서 나올 수 있었다. 중원 문명이 황하 중하류 지역의 단일한 주도권이 아니라 보다 다양한 분산된 중심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 거기서 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강남 지역 개발은 중원 지역의 생산력 저하를 보완해주는 역할에 그치고, 주도적인 정치 경제 사회적인 중심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중국 역사에서 몇몇 왕조가 남경 등 강남 지역에 수도를 정하고 그 지역을 정치적 중심으로 삼았지만 그런 왕조들이 결과적으로 중국의 패권 생성과 유지라는 점에서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

 

수나라의 대운하도 사실은 피폐해가는 중원 지역의 생산력을 강남의 보조를 통해 되살리는 성격이었다. 이후에도 그런 구조는 기본적으로 변화가 없었다. 일시적으로 강남 지역에 근거를 두었던 왕조들이 대부분 다시 하북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기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차이가 있다면 토지가 극도로 척박해진 황하 중류 지역에서 하류 지역 즉 하북 지역으로 중심이 약간 이동했다는 정도이다. 지금 중화인민공화국까지 그 구조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경우 고대에는 중원 문명의 영향과 함께 한반도 남부를 중심으로 한 고대 해양 무역 네트워크가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도 사실상 이 해상 네트워크의 일원이었던 것으로 안다. 하지만 한국사의 전개 과정은 한반도에서 해양 무역 네트워크에 근거한 가치의 다양성이 사라지고 대륙문명의 가치관이 일원적으로 모든 것을 흡수 통일해가는 과정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신라의 삼국통일이 그러한 움직임의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과거 한반도와 거의 한 문명으로 묶일 수 있었던 일본 열도가 한반도와 분리되기 시작하고 중국의 영향력이 한반도에서 계속 확대 강화되는 과정을 밟아온 것이다. 그 완성이 바로 성리학을 근본으로 완전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가치의 일원화를 달성한 조선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사실 한반도와의 절연이 타격이기도 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도움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강력한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의 등장을 추동할 수 있는 외부의 영향력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수십 수백 개의 번, 사실상 독립국가들이 나름의 독자성을 갖고 자기 개발과 발전의 로드맵을 갖고 노력하는 사회는 조선처럼 숨막힐듯한 단일 가치의 질식 압박에서 훨씬 자유롭다.

 

그래서, 일본의 메이지유신과 근대화는 사실상 그 이전 몇백 몇천 년의 역사적 축적에서 가능했지, 느닷없이 개항을 조선보다 먼저 했다고 해서 얻어진 결과물이 아니다. 개항 자체를 받아들이는 조건과 능력에서 일본은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지금 한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도 바로 이 중원 문명의 흔적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본다. 개인의 부재와 그로 인한 책임의 실종, 계약 정신의 실종, 법치의 난맥,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권위의 추락 등이 그것이다. 이것을 집약한 현상이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짜 근성이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진화하는 것은 이 중원 문명의 흔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척결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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