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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12)] “살아야 했어. 그것 밖엔···” 누구의 잘못인가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 ①편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5.21 17:29 | 최종 수정 2020.05.27 10:31 의견 0
체르노빌 (출처: 픽사베이)

◇1986년

1986년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그해에는 아시안 게임이 개최될 예정이었다. 아직 세계는 하나가 아니었기에 체르노빌과 관련한 내용은 크게 보도되지 않았다. 아마, 보도됐다고 하더라도 어렸던 나에게 어떤 영향도 끼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살던 곳은 공기도 좋고 물도 좋고 인심도 좋은 곳이었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공기가 나쁠 수 없었고, 시내버스도 하루에 왕복 스무 대도 지나다니지 않는 곳이었으니 흔히 말하는 ‘깡촌’이었다. 학교에 가려면 최소한 짧은 보폭으로 30분 넘게 걸어야 했고, 중학교 이상은 버스를 타고 등교해야 했는데, 만원 버스도 그런 만원 버스가 없었다.

마을 입구에는 ‘범죄 없는 마을’이라는 비석이 서 있었는데, 실제로 문을 활짝 열고 다녀도 도둑이 없었다. 그만큼 훔쳐 갈 게 없기도 했고, 모두 정겨운 이웃사촌이었다는 의미였다. 한 집 걸러 인척간이었으니, 도둑질하려고 해도 마음에 족쇄를 찬 마냥 편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그해 겨울이 돼 눈이 내리니,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다. “소련에서 핵실험이 잘 못 돼 내리는 눈이 좋지 않단다. 그러니 눈은 맞지 않는 게 좋아.” 핵이 뭔지도 몰랐고, 단지 나쁘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당장은 수긍하는 척했지만, 아이들에게 하얀 눈은 그런 위험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만류하시던 어머니께서도 눈밭에서 뒹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행복을 뺏기는 어려웠는지 더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같은 1986년에 체르노빌은 다른 세상이었다.

“살아야 했어. 그것 밖엔······.”

체르노빌 원전에 문제가 생겼다. 원자력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었던 사람이 그 시공간에 얼마나 있었을까? 정치인도, 철학자도, 농부도, 일반 시민도 제대로 대응할 수 없었고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다.

“일하라고 하니 해야되는 것이었다. 조국이 부르고 조국이 명령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이후 오직 그들의 삶은 ‘생사(生死)’만 존재했다. 인간의 삶을 단순하게 생각하면 생명으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난다. 그러나 시작과 끝만 있는 게 삶이 아니지 않은가? 그 중간을 삶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삶을 소중하게 여긴다.

그러나 무지는 삶을 빼앗았다. 아니, 무지를 종용한 그렇게 하도록 세뇌시킨 권력으로 인해서 그들은 원전 폭발과 함께 인생을 송두리째 날려야만 했다.

집에 돌아왔다. 댄스파티에 갔다. 마음에 드는 아가씨가 있었다.
“우리 사귀자.”
“왜 너랑 사귀어? 너는 이제 체르노빌레츠잖아. 누가 너한테 시집간다고?”
다른 아가씨를 소개받았다. 입 맞추었다. 포옹했다. 결혼할 것 같았다.
“결혼하자.” 내가 청혼했다.
그러자 ‘할 수 있어?’라는 식의 질문을 했다. 내가 불구가 아닌지 물었다.
떠나고 싶다. 아마 떠날 거다. 부모님이 안됐을 뿐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정상적인 삶이 불가능하다. 편견은 사실을 외면한다. 그들이 옳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가로 돌아온 게 미래의 죽음이라면 누가 그들의 삶을 보상해 줄까?

인간이 보상해 줄 수 없다면 신이 그렇게 해줘야 할 텐데, 사회주의 국가에는 신이 없다. 작가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내 눈에는 구역에 남겨진 수백 개의 동물 묘지나 고대 사원이나 똑같아 보인다. 어떤 신을 위한 것이냐의 차이다. 학문과 지식의 신인가, 아니면 불의 신인가? 그러한 의미에서 체르노빌은 아우슈비츠와 콜리마*를 넘어선다. 홀로코스트를 능가한다. 체르노빌은 끝을 보여준다. 체르노빌은 막힌 벽에 도달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인간을 위하거나 인간을 해(害)하는 인간이 존재할 뿐이다. 구소련은 신앙은 없었지만, 그 못지않은 신념이 있었다. 공산주의 신념은 그들의 머리와 육체를 지배했다. 그 힘이 사라지니, 사람들은 정신적인 공황과 더불어 체르노빌과 같은 원전사고는 육체적 재앙까지 가져왔다.

“두 개의 재난이 겹쳤다. 첫 번째 재난은 사회주의의 몰락이었다. 우리 눈앞에서 소련이 붕괴하면서 거대한 사회주의 선박이 침몰했다. 또 다른 재난은 체르노빌이라는 우주적 재앙이었다. 중략 체르노빌에 대해서는 잊고 싶어했다. 사람들의 의식이 체르노빌 앞에서 무너졌기 때문이다. 의식의 재난이었다. 우리가 생각하던, 우리 가치관의 세상이 폭발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정신적인 공황과 물리적인 공황이 겹쳤다. 그들의 삶을 구원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사회주의에 존재하지 않는 신 역시 그들을 도와주지 못한다.

“교회에 다녔다. 신부님께 이야기했다. 기도해서 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하지만 우리 집안에 사람을 죽인 이는 아무도 없다.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지?”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붕괴로 인한 재앙의 탓을 나의 죄로 돌린다. 단순하면서 명확한 종교적 처방이다. 그 처방은 현재 진행형이다. 2020년을 살아가는 이 땅에도 종교적 처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성직자는 세상을 모르고, 모르는 게 당연한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과거와 다른 해결 방법은 존재할 수 없다.

어쩌면 축복받은 사람은 그들의 삶에 내린 재앙의 원인과 과정, 결과를 모른 채 그저 살아가는 민중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구의 잘못인가?

사회의 수준은 ‘책임’에 달려있다.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그 공과에 합당한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정의로운 세상이라면 당연히 고하 직위를 막론하고 책임을 지게 할 테지만, 그렇지 않은 세상이라면 정의보다 위에 있는 권력이 정의를 대신할 것이다.

체르노빌 사태는 누구의 잘못인가? 라는 질문에 작가는 특정한 부류의 잘못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작품에서는 ‘인간’, ‘과학’, ‘권력’, ‘무지’, ‘욕망’, ‘무규칙’ 등을 제시한다. 물론, 소련이 해체된 이후의 작품이기에 전체주의적이었던 체제를 비판한다.

“알고 싶은가? 감옥과 유치원이 섞인 곳. 거기가 바로 사회주의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람이 국가에 마음과 양심, 심장을 내어줬지만 그에 대한 보상으로 돌아온 것은 배급이었다. 그리고 각자 운에 따라 많이 받는 사람, 적게 받는 사람으로 나뉘었다. 공통점이라곤 그 배급이 영혼에 대한 대가라는 점이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그리고 그런 체제를 지탱할 수 있었던 원인으로 작가는 우선 인간의 욕망, 권력을 보여준다.

“과학은 정치를 섬겼고, 의학도 정치로 끌어들였다. 당연지사였다!”

“사람의 나라가 아닌 권력의 나라였다.”

“권력은 참 놀라운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이에게 행사할 수 있는 측정 불가능한 권력이다. ”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다음으로 무지와 무(無)사고(思考)를 비판한다.

“그들은 악당이 아니었다. 무식과 협력의 음모에 말려든 것뿐이었다. 그들이 습득한 삶의 원칙은 ‘튀지 말 것’, ‘잘 보일 것’과 같이 기계적이었다.”

“신문에서 읽은 게 조금 생각나는데, 우리 원자력 발전소는 정말 안전하기 때문에 붉은 광장에다 세워도 괜찮다고 했소. 크렘린 바로 옆에. 사모바르보다 안전하다고 했소. 발전소가 별 같은 거고, 그 별을 우리 땅에 ‘심는다’고 했소.”

텔레비전을 켜니 고르바초프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신속하게 조치를 취했습니다.” 나는 믿었다. 물리의 법칙을 잘 아는 20년 경력의 공학자인 내가 그 말을 믿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이 목소리들은 모두 작가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가 나누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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