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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트라는 그림자를 가리기 위해 복면을 쓰다 - 영화 <복면달호>

[무의식과 트렌드] 페르소나가 상품이 되는 시대⑥ 이야기로 살펴보는 페르소나와 그림자(中)

김혜령 기자 승인 2019.08.19 12:12 | 최종 수정 2019.08.19 18:37 의견 0

지난 회에서 소개한 전래동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는 예로부터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인간의 무의식 기저와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축적되어 왔으며 칼 융의 연구를 통해 체계적인 정리가 이루어진 것일 뿐이지요. 그리고 현대에 이르러 페르소나를 장려하는 시대가 열리기까지 된 것입니다.(이경원 교수 인터뷰 “시대가 페르소나를 요구한다” 참조)

영화 <복면달호> 포스터

¶ 2000년대 초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영화 <복면달호>

이번에 다루는 영화 <복면달호>는 2007년에 만들어진 작품입니다. 영화가 개봉된 지 10년이 지났기 때문에 영화의 내용보다는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복면가왕>의 모티브가 된 가면 쓴 배우 차태현의 모습과 주제가 <이차선 다리>로 익숙한 영화입니다.

그러나 영화 <복면달호>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시작하던 2000년대 초 대한민국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당시는 IMF 사태로 경제상황이 급격하게 악화되었다가 국가와 국민들의 노력으로 경제위기를 조기에 극복하고 2002월드컵을 거치며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취업난은 해결되지 않았고, 중년들은 명예퇴직을 준비해야 했기에 사람들의 생활과 마음은 급격히 쪼들리고 있었습니다. 경제가 급격히 성장하고 소득수준이 높아지며 노력만 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낙관하던 80~90년대와는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것은 포기한 채 경제적 생존을 위해 사회로부터 요구받은 페르소나로 살아가는 시기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화 <복면 달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뽕짝이라고도 부르는 트로트 감성을 통칭하는 '뽕필'을 연상시키는 '봉필'이라는 예명으로 트로트 가수 데뷔를 앞둔 '달호"  (출처: 네이버 영화)

¶ 락커 vs 트로트 가수, 가난 vs 성공

영화의 주인공 달호는 락커를 꿈꾸며 친구들과 밴드를 운영합니다. 그러다 한 기획사가 달호의 노래에 반해 계약을 제의하게 됩니다. 화려한 데뷔를 꿈꾸던 달호는 오랫동안 무명생활에 질려 밴드 동료들과 결별하고 기획사가 있는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런데 소속사는 달호를 트로트 가수로 데뷔시킵니다. 방송 출연의 기회를 잡은 달호.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었던 락을 포기하고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는게 창피했던 달호는 복면을 쓰고 무대에 오릅니다. 복면 퍼포먼스가 더해진 그의 노래 <이차선 다리>는 관객들에게 뜨거운 환호를 받았습니다. 

화려한 데뷔로 그의 트로트 가수 생활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러나 그가 트로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달호의 소속사 가수이자 연인이 된 서현입니다.

서현은 어느 날 달호를 찾아와 복면을 쓰게 된 이유가 트로트를 부끄러워하는 것 아니냐며 꼬집어 냅니다. 그리고 당당하면 가면을 벗으라고 이야기하죠. 달호의 새로운 내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달호는 연말 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가면을 벗어던지며 자신의 진심을 관객들 앞에 고백합니다.

¶ 달호의 페르소나 vs 그림자: 복면 vs 트로트가수

영화 <복면달호> 속 달호의 그림자는 트로트입니다. 영화 중반까지도 그는 자신이 트로트가수로 데뷔한다는 사실을 창피해하며 연습을 소홀히 하는 등의 모습을 보입니다. 트로트 가수다운 ‘봉필’(*주: 뽕짝이라고도 부르는 트로트 감성을 칭하는 뽕필과 유사한 작명)이란 예명으로 트로트 가수로 데뷔하게 되자, 자신의 그림자를 감추기 위한 페르소나로 ‘복면’을 사용합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가면이 달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트로트 가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복면을 쓴 달호’는 페르소나에 완벽히 젖어든 모습이며, 페르소나가 되기 위한 변신체죠. 한편, 가면을 쓴 트로트가수로 인지도를 얻어 인기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그의 모습은 ‘트로트를 창피해하는 달호’가 아니라 ‘트로트 가수 봉필’의 모습입니다.

소질은 없지만 트로트 가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서현에게 반한 달호. 서현은 달호가 트로트 가수를 결심하게 만들게 만든 존재이지만, 복면을 벗고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도록 깨우쳐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출처: 네이버 영화)

¶ 페르소나-그림자의 화해: 연인의 도움(가족, 친구, 지인)

사실 봉달호가 트로트를 시작하게 된 이유는 소속사에 있던 여가수 서현 때문이었습니다. 서현의 환심을 사기 위해 소속사에 남기로 하며 본격적으로 트로트를 시작하게 됩니다. 

서현은 어릴 적부터 트로트가수를 꿈꿨던 여 주인공입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노래부르는 모습을 좋아했던 아버지의 모습을 떠올리며 트로트가수가 되기 위해 꾸준한 노력을 하지만, 실력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낙향합니다. 

그렇지만 그녀 자신은 트로트를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노력했던 사람이었기에 복면 안에 숨은 달호를 비판합니다. 진정으로 트로트를 사랑하지 않고 당장의 인기에 안주하는 모습을 정확하게 꼬집어냅니다.

달호의 심리적인 가면은 자신이 좋아하든 여인 서현의 말 한마디로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어서 음악의 본질을 고민하게 됩니다. 이내 그는 사람들도 듣기 좋고, 내가 했을 때 신나는 게 음악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림자를 외면하는 대신 마주하는 쪽을 선택합니다.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갈등과 화해는 영화 마지막 장면의 콘서트에서 보여준다. 후련한 마음으로 자신의 대표곡 <이차선 다리>를 트로트 버전과 락 버전으로 공연하는 달호의 모습.  (출처: 네이버 영화)

¶ 페르소나 속의 자유는 정체성을 아는 것부터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트로트 곡이었던 <이차선 다리>를 자신이 하고 싶었던 락으로 편곡해 밴드 동료들과 신명나게 연주하며 마무리됩니다. 이 장면에서의 달호는 자신의 현재 모습을 완벽히 받아들이고, 현실을 즐기는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한 가지 더 살펴보자면 서현의 행동에도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잠시 접고 낙향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결코 꿈을 버린 채 내려가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의미에서 자신을 찾기 위한 쉼을 얻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는 2000년대 들어 등장한 웰빙트렌드와 더불어, 올레길 트래킹, 제주 한 달 살기 등의 유행과도 연결됩니다. 잠시 번잡한 곳을 떠나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돌아볼 시간을 가지려 노력하는 지금의 세대를 반영한 캐릭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회는 페르소나를 요구하지만, 요구받은 페르소나 속에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선 자신의 정체성을 명확히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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