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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읽기(13)] 홀로코스트를 능가하는 체르노빌 악몽

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 ②편 -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2015년 수상자)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0.06.08 09:45 의견 0

진보는 무엇인가? 진보(進步)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진보가 직진(발전)만 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한 가지 분야는 발전해서 상향 선을 그릴 수 있지만, 반대로 다른 분야는 하향 선으로 돌아 설 수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과학 기술의 발달로 자동차, 항공기, 에어컨, 냉장고 등의 발명품으로 인간의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환경은 오염됐고 지구 기온이 위험수위까지 상승해서 인류의 생존을 염려해야 한다.

◇작가는 이런 진보를 비판한다.

“우리의 ‘소비’는 끝없이 증가하고, 그것을 ‘진보’라 부른다. 살상무기가 개발되어도, 그것을 진보라 부른다. 방사선 때문에 죽어가는 체르노빌레츠와 얼마 전 재난을 당한 일본인, 그리고 희생자의 유족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며,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가 무엇인지 물어보라. 신형 휴대전화 혹은 자동차와 삶 중에 무엇을 선택하겠는가?”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작가는 선택을 강요한다. 더 나은 ‘소비’와 ‘삶’ 중에서 어떤 걸 선택할 거냐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한 진보가 과연 삶을 더 풍요롭고 행복하게 해줬는가?”라고 반문한다. 답은 독자의 몫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읽으며 대답하는 대다수 독자는 독후 감상에 진보에 대한 회한 혹은 비판적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그 정도로 작품은 진솔하게 정리됐다. 인간, 동물, 식물, 토지 등 등장하지 않는 게 없다.

동물을 ‘걷는 먼지’라고, 사람을 ‘말하는 흙’이라고 불렀어. 사람이 흙을 먹어서, 그러니까 흙 덕분에 사니까 ‘말하는 흙’이래.”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모든 게 동일 선상에 놓여있다. 인간을 중심으로 생각했던 독자라면, 금세 반성하게 된다. 작품은 인간의 목소리만 담은 게 아니라 살아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의 목소리다. 그리고 부제로 붙은 “미래 연대기”는 디스토피아(dystopia)를 의미한다. 결국, 모든 것의 죽음, 혹은 멸종, 절망, 회복 불가능을 전한다.

진보가 죽음이라면, 아무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진보가 정말 지옥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유토피아가 아니라 디스토피아라면 누가 발전과 진보를 바랄 것인가?

◇원자력(핵)의 위험

원자력의 유용성(utility) 검증은 끝났다. 그래서 미래 에너지 자원으로 기대됐던 시대가 있었다. 핵의 평화로운 사용은 핵전쟁이 아니라 원자력으로 인한 풍요로운 미래를 그리게 했다. 그러나 인간은 유용하고 평화로운 핵을 이롭게 사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관리할 줄은 몰랐다. 아니 그렇게 쉽게 위기가 닥쳐 오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신문에서 읽은 게 조금 생각나는데, 우리 원자력 발전소는 정말 안전하기 때문에 붉은 광장에다 세워도 괜찮다고 했소. 크렘린 바로 옆에. 사모바르보다 안전하다고 했소. 발전소가 별 같은 거고, 그 별을 우리 땅에 ‘심는다’고 했소.”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일반 사람들은 믿었다. 정부의 이야기를 철석같이 믿었다. 믿지 않아도 달라질 게 없었을 테니, 믿는 게 나았을 것이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 거 없습니다. 아직 거기서 사람이 살면서 일하고 있어요.”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원전 사고를 처리하기 위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뛰어들었다. 이들은 숫자를 몰랐다. 그리고 과학자도 아니었다. 그냥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정부는 당장 보이는 금전으로 현실을 속이고 미래를 담보 잡았다.

“우리는 2~3년이면 충분하다고 했다. 이 시설은 품질과 안전 면에서 축산공업단지나 양계장에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부족한 자재가 발생하면 설계는 무시하고 지금 눈앞에 있는 걸로 대체했다. 그래서 터빈건물의 지붕이 아스팔트로 덮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지붕에 난 화재를 소방대원들이 진압했다. 또 원자력 발전소 관리는 누가 했는가? 지도부에 핵물리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동력기사, 터빈기사, 정치부원은 있었지만, 전문가는 한 명도 없었다. 물리학자가 한 명도 없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미래를 고통스러운 죽음으로 선고받은 자들은 ‘영웅’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사람들이 원했던 건 영웅이 되는 게 아니라 일반인으로 살 수 있는 ‘사실’을 알고 싶었을 뿐이다.

◇국가는 영웅을 원했다

“비극을 촬영하는 것은 금지됐고, 영웅만 촬영하도록 허락해줬소.”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영웅은 일반인들이 동경하는 삶을 산다. 위대한 업적, 훈장, 명예 등은 그들을 현세뿐만 아니라 후세에도 알릴 수 있도록 해준다.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투입됐던 일반인들도 그런 의미에서 영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영웅적인 삶의 말미가 그다지 좋지 않듯이 – 단명, 암살, 중상모략 등 – 체르노빌 영웅들의 자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영웅은 만들어진다. 그리고 영웅이라 칭하기에 본보기가 된다.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은 그가 사망한 지 수천 년이 지났어도 전설처럼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열병에 걸려 30대의 나이에 요절했다는 사실은 얼마나 알까?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같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의 명성은 잘 알지만, 생애 말미가 쓸쓸했고 결국 독극물 살해로 인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또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기억할까?

체르노빌의 영웅도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한 위패가 즐비하겠지만, 그들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갔는지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영웅이 되기보다는 그저 일반인들처럼 살아가길 바랐던 범인(凡人)이었다는 사실을 얼마나 기억할까?

◇미래 이야기

과거가 아니라 미래 이야기다. 1986년 4월 26일은 과거다. 그러나 현재와 미래에 걸쳐 있다.

“수천 년은 갈 겁니다.” 그가 설명했다. “우라늄이 붕괴하려면 238번 반감해야 하는데, 그걸 시간으로 환산하면 10억 년입니다. 토륨의 경우 140만 년입니다.” 50, 100, 200년. 그 이상이라고? 그 이상은 충격이야! 그때부터 나는 시간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대중은 위 숫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대중이라면 더 그렇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핵폭발의 위험이 존재하던 때가 있었소. 용해된 우라늄과 흑연이 지하수에 들어가지 않도록 원자로 아래에서 지하수를 빼내야 했소. 우라늄과 흑연이 물과 섞이면 임계질량*이 형성되기 때문이었소. 폭발력이 3~5메가톤쯤 됐을 것이오. 키예프와 민스크만 초토화할 뿐 아니라, 거의 유럽 전체가 사람이 살지 못하는 땅으로 변했을 것이오. 상상이 되오? 전 유럽적 재앙.”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유럽이라는 세계가 멸망할 수 있었다. 그 멸망을 미래를 건 영웅들이 막아선 것이다. 누가 미래를 날리고 싶었을까? 아무도 자신의 미래를 현재에 버리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끝나지 않았음에도

체르노빌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래까지 계속되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미 과거의 기억이 됐고, 현재는 추억으로 끄집어내는 수준이다. 아니면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받아들이지 못한다.

“사건은 아직 우리 문화 속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문화의 트라우마다. 우리의 유일한 답변은 침묵이다. 아이들처럼 눈을 감고 생각한다. ‘꼭꼭 숨었으니까 못 찾겠지.’ 무언가 미래에서 우리를 기다린다. 하지만 우리 감정이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우리가 그것을 견뎌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고통의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지옥과 같은 현장을 즐기려 한다.

“핵 관광은 특히 서양 여행객들 사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다. (중략) 사는 게 진부해졌다. 그래서 뭔가 영원한 걸 맛보고 싶어 한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과거의 상처가 현재의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이 어이없다. 현재의 무지가 미래를 망쳤는데, 어떤 사람들한테는 지루한 일상의 탈출구가 된다. 물론, 핵의 위험을 경고하고 끔찍했던 당시 상황을 떠올리면서 반면교사(反面敎師) 삼기 위한 노력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대인은 그런 교훈을 상상하기에는 가상 이미지로 많은 훈련을 받았다. 더 자극적인 걸 보고, 느껴야만 과거 수준의 고통을 토로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체르노빌이 콜리마와 아우슈비츠, 그리고 홀로코스트를 넘어선다는 걸 알게 됐어요. 제 설명이 알아들을 만 한가요?”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中

끔찍한 인류의 역사적 과오(過誤)다. 그러나 단 하나라도 피부에 소름 돋는 단어가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냥 “사는 게 진부해져서 뭔가 영원한 걸 맛보고 싶어 할 뿐이다.”

체르노빌의 목소리:미래 연대기  (예스2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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