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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독일 통일(74)] 동독의 생각

칼럼니스트 취송 승인 2019.09.17 12:40 의견 0

그렇지만 동독의 호네커 측이 여기에 환호한 것 같지는 않다. 비록 1984년에는 소련 측의 요청에 따라 무산되었지만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 공식 초청은 여전히 유효한데다, 1983년과 1984년 두 해에 걸쳐 동독에 19억5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한 콜 총리와 호네커 측이 모두 ‘책임공동체’, ‘이성연합’이라 부르는 콜 총리 정부와의 동서독 관계에 더 비중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브란트의 방문에 관한 “빌리 연호는 드물었다는” 제목의 1985년 9월 27일자 차이트지 보도 기사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사민당과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의 존재 인정과 교류의 강화와 공동보고서 발표, 1989년 12월 20일 베를린 당대회에서 채택된 강령, 유럽과 독일 문제에 관한 베를린 선언 등에서 사민당의 독일정책은 1972년 동서독 기본조약 발효 시의 독일정책의 “사실상” 두 개 국가 정책에서 더 나가서 실질적인 두 국가 정책 노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1990년 3월 동독 자유 총선 및 이후 동독 지역 내에서의 사민당의 정치적 위상과 직접 관련된다.

기민련의 경우도 1982년 헬무트 콜 총리의 정부 수립 이후에 사민당-자민당 정부에서 체결한 동서독 기본조약을 포함한 동방정책 관련 조약을 유지하였다. 이를 두고 콜 정부가 이전의 사민당-자민당 연립정부의 정책을 계승했느냐 여부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콜 정부는 인간적 고통 완화와 접촉 추진 강화 목적을 가진 동독과의 조약정책을 원칙적으로 계속하였지만, 사회주의통일당 국가와의 규범상 거리를 두는 것과 독일문제의 개방성을 더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서방 동맹과의 유대와 유럽통합 과정의 강화가 더욱 요구되었다. 이렇게 조성된 신뢰 자산이 1989/1990년 재통일 시에 그 가치가 입증되었다고 연방의회 조사위원회는 보고 있다.

그러나 콜 정부는 사민당의 강력한 반대를 뚫고 나토의 군비강화 결의의 실현, 즉 구체적으로는 미국의 중거리 핵 미사일 서독 내 배치를 실현하고 유럽 통합과정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기민련의 전통적인 독일정책 기조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독일 통일이 단기간에 이루어질 수 없어 보인다는 것 그리고 동독의 인권문제와 이의 거부를 독일정책의 중심에 두면서 1980년 호네커의 게라 요구를 거부하는 등 동독의 국가 승인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기민련의 독일정책 노선은 1978년 기본강령(Grundsatzprogramme)에 규정되어 있고, 1983년 선거강령(Wahlprogramm)의 강령에서 재확인되고 있다. 이 노선에 따르면 모든 동방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 및 후속 조약은 변함없이 이행하지만 국가 계속성의 원칙에 기초한 아데나워 총리의 기민련에서 설정된 종래까지의 재통일 과제, 독일국민 전체의 이익 대표, 단일 국적 원칙은 고수하고 있다.

‘전체 독일 국민을 위하여 자유, 평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독일정책의 과제(Freiheit und Einheit für das gesamte deutsche Volk zu erringen, ist Aufgabe der deutschen Politik)’라는 1978년 기본강령의 독일정책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전체 독일 국민에게 자유와 통일을 가져다주는 것이 독일정책의 임무다. 평화 속에서 우리는 유럽의 분단 그리고 이와 함께 우리 조국(Vaterland)의 분단의 극복을 원한다. 우리는 정책 수단으로서 무력의 위협이나 그 사용을 거부한다. 우리는 현실적 힘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의 힘은 정부의 정책과 무력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인 힘을 보유한 독일민족의 통일 의지도 포함하고 있다.

자유로운 자기결정은 단순한 힘의 사용 거부 이상의 평화의 일부다. 이는 세계 어디서나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법의 힘을 신뢰한다. 자결권이 모든 독일인에 의해 행사될 수 없는 한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은 모든 독일인의 자유로운 질서의 수임자다. 이는 독일인의 기본권과 인권을 보호하는 의무를 이행한다. 우리는 하나의 분리되지 않은 독일 국적을 고수한다. 독일문제는 개방되어 있다.

우리는 모든 부분에서 독일 의식을 보전하며 이를 유지한다. 우리는 분단된 국가에서 삶을 용이하게 하고 접촉을 촉진하고, 인권을 강제하며 장래 통일의 기초를 공고히 할 협상과 합의를 긍정한다. 외국과 동독과 체결한 독일연방공화국의 모든 조약은 구속력을 가진다. 독일통일에 관한 서한, 1972년 독일 연방의회의 공동결의와 1973년 및 1975년 연방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여전히 동방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의 해석과 적용에서 결정력을 가진다.

베를린은 변함없이 전체 독일의 수도이며, 이는 민족적 과제이고 우리에게 동유럽 진영과 긴장완화의 시금석이다. 전체로서 독일과 함께 4강국이 권한과 책임을 가지는 전체로서 베를린은 변함없이 독일인의 민족의지의 표현이다. 자유 베를린은 독일연방공화국의 한 연방 주며 자유 유럽의 일부다.

베를린 협정이 고려하고 있는 국제법상의 유보는 그대로 유지된다. 3강국과 협력하여 우리의 임무는 자유 베를린의 생존능력을 확보하고 강화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유 베를린과 독일연방공화국 간의 유대를 유지하고 강화할 것이다.

독일통일을 맞이하게 되는 1987년 선거강령에도 이를 확인하고 있다.

‘우리는 전체 독일인의 이익을 대표한다(Wir vertreten die Interessen aller Deutschen)’라는 제목 하에 독일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민족 및 유럽에 대한 책임”에 따라 “소비에트의 제국주의에 의해 야기된 비인간적인 분단을 극복하고 독일 국민들이 자유로운 자기결정 속에 통일을 회복하는 유럽의 평화 상태를 위하여 노력”하고, “독일제국의 계속성, 공동국적법 제도”를 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사민당은 이를 포기했다고 비판했다.

“4강국은 변함없이 전체로서 독일에 대하여 책임”이 있고, “동방조약은 국경 인정 조약이 아니며 국제법상 독일의 지위를 변경한 것이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

모스크바 조약, 동서독 기본조약 등의 잠정성을 전제로 하여 독일의 두 개 국가를 부정하고 1945년 종전 이래 전체로서 독일과 베를린 문제의 최종적 결정을 보유해온 4강국의 권리와 의무를 확인하고 국경을 포함한 독일문제는 최종적으로 평화조약에 의해 결정된다는 지금까지 기민련의 독일정책을 재확인하였다. 그리고 이는 1987년 11월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독일통일에 이르는 과정에 적용된다.

1980년대에 제도권에 진입한 녹색당의 입장은 당 전체로서 일관된 것이 아니었다. 독일 ‘평화정책’의 불가피성에 대한 합의에 기초한 녹색당 당내 주류의 일부는 완전하고도 국제법상으로도 그리고 최종적인 두 개의 독일 국가 인정을, 또 다른 일부는 사회주의적이고 중립적인 전체 독일에 대한 전망을, 마지막으로 다른 일부는 동독의 협력 가능한 세력과 함께 ‘밑으로부터의 평화정책’의 직접적 추진이라는 직접적 과제를 지향하였다.

많은 경우 사회주의통일당 국가의 비현실적인 구상에 고무되었을 수 있는 과반수가 독일통일 목표를 거부하면서 녹색당은 변화의 시대에도 동독 주민 과반수의 원망(願望)과 목표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이제 이런 제 정파의 독일정책은 1989년에 절정에 달한 동독 민주화운동과 함께 통일과정 속에서 1990년 3월 동독 자유총선과 그 해 9월 전체 독일 총선에서 동독 유권자와 전체 독일 유권자의 심판대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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