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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3)] 여운형,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만들다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3.25 10:00 | 최종 수정 2019.07.04 01:45 의견 0

¶ 3.1운동의 발화점, 민족자결주의

‘민족자결주의’

아마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1차세계대전 후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했으며, 이는 우리 민족에게도 독립을 할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위키백과

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되고 그 뒤처리를 위해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열리죠. 이때 미국의 대통령이던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습니다. 민족자결주의 “각 민족은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으며,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을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당시 강대국으로 급 부상중인 미국의 대통령이 발표한 민족자결주의는 한반도에도 큰 영향을 줍니다. 미국이 우리에게 힘을 실어주면 독립을 할 수 있겠다,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생각이었던 것이죠.

물론 이 말에는 함정이 존재합니다. 승전국의 식민지는 ‘민족자결주의’의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의미였다는 사실이죠. 우리는 일본이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라는 사실만 잘 알고 있지, 1차 세계대전에서는 연합국으로 전쟁에 참여해 미국 등과 함께 승전국의 지위를 가졌다는 것은 잘 모릅니다. 윌슨이 말한 ‘민족자결주의’는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등의 패전국의 식민지 독립에 초점을 맞춘 것이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승전국의 식민지들은 독립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국제관계를 파악하는 시선이 날카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민족자결주의가 등장했을 때, 이때가 독립을 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겼던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 내부적으로는 ‘민족자결주의’의 주장이 3.1만세 운동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10년 동안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말이죠.

▲1919년 일본 도쿄 기자회견 당시 여운형의 모습 ⓒ 위키백과

¶ 여운형, 신한청년당을 조직하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여운형입니다. 여운형은 우리가 거국적인 독립의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의지를 표현할 만한 확실한 액션이 필요했던 것이죠. 그래서 신민회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국내외로 파견해 거사를 계획했습니다.

여운형은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독립의 기회를 확실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동경과 서울, 연해주 곳곳으로 파견해 3.1운동을 위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강조하는 겁니다만, 3.1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분노한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친 사건이 아닙니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서로 네트워크를 형성해 치밀한 협업형태를 이루며 추진한 계획적인 독립운동입니다.

¶ 신한청년당, 동경. 서울. 연해주 곳곳에서 독립운동 네트워크를 형성하다

여운형은 가장 먼저 강화회의가 열렸던 파리에서 우리의 독립 의사를 전달해야한다고 생각해 사절단을 만들고 특사를 파견합니다. 특사를 맡을 사람은 영어를 잘 해야겠죠 여운형은 당시 북경에 머무르고 있던 김규식을 찾아가 파리 특사를 맡아 우리의 이야기를 전달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김규식은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리에 파견되어 조선이라는 나라가 독립에 열망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전달합니다.

▲ 1918년 이후 여운형의 행적. 연해주, 서울, 도쿄 등에 신한청년당원을 파견해 독립운동의 인프라 마련에 힘썼다. ⓒ 시사N라이프 편집부


한편, 김규식은 파리에 특사로 파견되기 전 여운형에게 독립의 의지를 직접적인 행동으로 표출해야한다고 전합니다. 외교관의 역할은 내가 할 수 있지만, 직접적인 행동이 같이 이루어질 때 독립의 의지를 전하는 데 힘이 더욱 실릴 것이라는 판단이었지요.

여운형은 김규식을 파리에 보낸데 그치지 않고 동경으로 장덕수를 파견합니다. 당시 동경유학생들 중에는 민족정신이 투철한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이 영향으로 동경유학생 최팔용을 중심으로 <2.8 독립선언>이 조직됩니다. 이때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사람이 당대 최고의 명문장가였던 춘원 이광수입니다. 물론 이들은 동경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잡혀 들어가게 됩니다.

<2.8 독립선언> 직후 송계백은 이때의 독립선언서를 들고 국내로 돌아옵니다. 일본의 감시와 수색에 독립선언서를 압수당할지 몰라 김마리아라는 여성의 치맛자락 속에 숨겼고, 국내 반입에 성공합니다. 이후 송계백은 국내의 독립운동 지도자를 만나 동경에서 일어난 독립선언서 사태를 전합니다. 어린 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독립선언서 낭독에 충격을 받은 지도자들이 자극받아 독립운동 준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습니다.

▲ 민족대표 33인의 모습 ⓒ서대문형무소 홈페이지

¶ 민족대표 33인의 두개의 축, 기독교와 천도교

여운형은 선우혁을 한반도로 보내 기독교 관련 인사들을 만나게 합니다. 이들을 설득해 만세독립운동을 연계해 진행할 수 있도록 합니다. 선우혁을 통해 기독교 중심으로 흘러가던 독립운동은 천도교와도 협력하게 되며 그 네트워크가 더욱 확장됩니다.

당시 천도교의 신도수는 100만이 넘었습니다. 전체 인구 비율로 따져봤을 때 7% 정도였죠. 그러나 기독교는 1.2%로 20만 명을 조금 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었죠. 당시의 기독교 교회는 대도시에 주로 분포되었고 지방으로 교세가 확장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지방으로 만세운동이 확장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지방에 포교활동이 잘 되어 있는 천도교와 함께 손을 잡고 만세운동을 계획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밖에 여운형은 연해주로 건너가 이동휘 등과도 접촉해 만세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국내외로 협력합니다. 이렇게 여운형의 신한청년당원들은 동경, 한반도, 연해주, 상해 등지로 퍼져나가며 3.1운동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데 기여했습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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