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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 작가의 3.1혁명(4)] 고종의 죽음, 3.1운동에 불을 지피다

이동진 작가 승인 2019.03.31 12:26 | 최종 수정 2019.07.04 01:46 의견 0

¶ 민족대표 33인 민족대표 48인!


3.1운동이 일어나게 된 이면에는 다양한 인프라와 연락망, 치밀한 계획이 숨어 있었습니다.

거국적인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에는 천도교와 기독교, 두 종교의 연합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종교인들로 구성되었습니다. 종교인이 많았던 건 당시 종교인들이 가장 덜 탄압받았기 때문에 만세운동의 주축세력으로 적합했습니다.

▲ 1920년 7월 1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 3.1 운동에 참가한 민족대표 48인 공판에 관한 기사문이다. ⓒ 위키백과


그렇지만 33인만이 3.1운동의 주요인사는 아닙니다. 33인에 들어가지는 않지만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도운 사람들도 있었죠.

천도교계 인사 중 이경섭이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는 군중들이 만세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도록 독립선언서를 배부하고 중간연락망을 담당한 인물입니다. 이런 분들까지 합쳐 민족대표 48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고종 의문의 죽음, 3.1운동에 불을 지피다

3.1운동의 불을 붙인 사건 중 하나는 고종의 승하입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이러니하죠 고종이 죽었는데 왜 만세운동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사회가 유교사회였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민심이 아무리 좋지 않았다 해도 100년 전 사회는 유교가 아직 뿌리 깊게 박힌 사회였습니다. 유림들이 지방에서 커다란 세력으로 있었고, 갓을 쓰고 다니는 선비들도 존재하던 시기였습니다. 당시엔 왕을 부모처럼 여기며 받들어 모셨죠. 개개인적으로 고종에게 악감정을 품을 수 있었을지 몰라도 고종의 승하는 민족 전체에게는 커다란 슬픔으로 다가오죠. 부모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 고종의 장례식 모습. ⓒ 위키백과


3.1일 운동으로부터 약 한 달 전의 일입니다. 고종의 승하가 사후 2일 후에 발표되며 백성들 사이에 고종이 독살 당했다는 의혹이 불거지기 시작합니다. 시체가 갑자기 빨리 썩더라는 소문마저 돌죠. 독살설이 퍼지면서 사람들 사이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타오릅니다. 이로써 일본에서 일어난 2.8독립선언에 이어 고종의 승하까지 3.1운동의 명분이 완성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건 고종의 독살설은 역사적 정설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고종이 독살당하지 않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일제가 이미 늙은 고종을 독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여전히 고종의 독살설을 주창합니다.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고종이 서울을 떠나 중국 북경으로 망명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이회영 선생님께서 고종의 망명프로젝트를 계획했었죠. 프로젝트를 수행하던 과정에서 고종이 죽음을 맞이합니다. 이에 일본이 고종을 제지하기 위해 독살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하지만 역사적 정설에서는 벗어난 사실입니다.

일부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는 고종 독살설을 믿으며 억울하게 죽은 고종을 위해 나라를 찾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는 독립운동을 하는데 주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했죠.

▲ 고종이 숨을 거둔 덕수궁 함녕전. 고종의 독살설은 정설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으나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위키백과

¶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 날짜에 맞추어 정해진 날짜

고종과 명성황후의 죽음은 우리 역사에 커다란 운동들을 일으킵니다.

명성황후가1890년 을미사변으로 시해당한 뒤1895년 일제에 대한 최초의 의병운동인 을미의병이 일어납니다. 드라마 <미스터선샤인>에도 등장하는 의병운동이기도 합니다. 나라의 어머니를 잃은 슬픔이 고조되며 백성들은 동요하는 감정을 의병운동으로 표출했습니다. 박시백의 역사만화 <35년>에도 보면 거사를 준비하며 손병희가 “황제가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구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구나”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1운동은 고종의 장례일을 고려해 정해졌습니다. 고종의 장례식이 3월 3일으로 정해졌고, 이날이 오기 전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일 테니 만세운동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는 예상이었습니다. 그러나 3월 3일은 월요일이었고 3월 2일이 일요일이었어요.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인었기 때문에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일요일은 피해 만세운동을 하게 된 것이죠. 그래서 3월1일 토요일이 거사일로 정해졌습니다.

[글쓴이: 이동진 / 시민들과 함께하는 역사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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