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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사건 특별기고(2)] 입양절차가 끝이 아닌데... 정인이가 겪었을 아픔

윤준식 기자 승인 2021.01.25 12:40 | 최종 수정 2021.02.15 12:10 의견 0

최근 정인이 사건으로 네티즌 사이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신년을 맞아 진행된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도 정인이 문제가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입양에 대한 인식과 방법론 모두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현실입니다.

때마침 <시사N라이프>는 의미있는 투고를 받았습니다. 입양 경험을 가진 한 아버지로부터 입양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정인이 사건을 시청률과 조회수를 높이는 데 활용하는 언론에 대한 불신도 토로했습니다.

이에 독립언론을 지향하는 <시사N라이프>에 무명으로 투고한다는 당부를 남겼습니다. 총 3회에 나누어 연재되는 솔직한 심정과 사연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서 정인이 사건과 입양에 대한 생각의 범위를 넓히시는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아이는 도구가 아니라 목적입니다. 부모의 ‘의’나 ‘행복’을 위해 입양해서는 안 됩니다

제 스스로 입양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나니, 제 마음 속에도 둘째에 대한 절실함이 생겼습니다. 입양과 관련한 교육을 받고 나서 양가의 어른들께도 입양 의사를 전해야 했습니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좋은 일이라 보시고 긍정적으로 받아주셨습니다. 여동생도 기꺼이 찬성해줬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의사와는 반대로 처가의 분위기는 달랐습니다. 모든 가족이 반대해 아내는 그 모든 어려움을 넘어야 했습니다. 끝내 모든 가족을 설득하고 둘째를 기다리게 됐습니다(현재는 양가 모두 둘째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십니다).

정인이의 입양 과정에서 정인이 조부모들의 반응은 어땠을지 궁금합니다. 양모의 학대를 알고도 무시한 양모의 부모를 두고 생각해보면, 어쩌면 입양에 긍정적이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반대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딸의 성격–관종 성향–을 알았고 목회자로서의 체면 등을 생각해 굳이 막지만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입양도 한 훌륭한 가정”이라 홍보하고 싶었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면, 양모의 ‘관종’ 성격은 혼자만의 특이성이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그 딸이 정인이를 이토록 무자비하게 학대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입니다.

친조부모 이야기는 별로 들리지 않는 걸 보면, 크게 관여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부부관계에 있어서 양부보다 양모의 입김이 더 큰 것으로도 느껴집니다. 그래서 양부도 양모의 말에 크게 토 달지 않고, 수긍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입양 후 사내 게시판에 입양 사실을 게시하고 축하받은 행동을 볼 때, 양부도 ‘관종’ 기질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종종 기독교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입양한 사실을 간증처럼 떠들 때가 있습니다. 마치 차인표, 신애라 가정이라도 된 듯 떠듭니다. 물론, 입양은 좋은 일이고 사회적으로 권장할 일이기 때문에, 공개하는 게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걸 간증처럼 떠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아이의 삶을 위해 입양한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입양한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이번 경우는 후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자녀가 장성했다 하더라도 입양 사실을 굳이 드러내기 싫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강단에 선 부모는 그런 자녀의 마음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건 부모의 의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늘이 주신 자녀의 행복한 삶을 도와주기 위해서 양육하는 것입니다.

다시 제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11월 경 입양부모를 위한 교육이 끝나고 얼마 후, 기관 담당자분이 우리 가정에 방문하셨습니다. 각 방을 다 사진으로 찍고, 화장실까지 촬영했습니다. 당시 5살이었던 첫째도 만났습니다. 첫째 상태를 봐야 둘째에 대한 양육상황을 예측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우리 부부는 모든 면담과 방문, 교육을 굉장히 긴장하며 준비했고, 잘 참여했습니다. 혹여나 결격사유가 발생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말이죠. 다른 입양가정도 그랬으리라 생각합니다. 진심으로 아이를 원하는 가정이라면 다 똑같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인이 양부모는 그렇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공개 입양은 하지 않습니다. 어렵게 만난 자녀를 입양했다고 공개하는 경우는 꽤 드문 일입니다. 성장 후 일정 기간 지나서 마음으로 낳은 자녀인 본인에게 입양 사실을 알리기는 하지만, 이 또한 조심스럽게 전합니다. 기관에서도 전하는 방법을 안내하는 관련서적을 펴낼 만큼 신중한 태도를 권합니다.

정인이 양부모는 입양 사실을 공개 밝히고, 정인이가 죽기 열흘 전에는 가학행위를 진행하면서도 방송에 출연하는 정신병적인 ‘관종’ 행태를 보여주기까지 합니다(이런 사실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출연시킨 방송국 담당자도 문제입니다). 정인이와 관련한 지원금을 계속 알아본 정황을 볼 때, 이들의 입양은 일반 가정의 목적과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우리 가정을 비추어 볼 때 입양한 둘째와 관련해서 축하 지원금(지자체별로 상이합니다)을 받은 것 외에 특별한 지원금을 요청하거나 받지도 않았습니다. 입양 절차가 끝나고, 개명까지 완료한 다음에는 입양했다는 사실조차도 잊고 지낼 정도로 아이에게 집중했기 때문이죠.

담당자 방문이 끝나고 두 달 후, 우리 가정에 오게 될 아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고, 또 얼마 후 둘째 사진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여아임에도 저의 어린 시절과 닮아서 ‘인연인가보다’라는 신기한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제 마음에는 확신이 없었습니다. 솔직히 부담도 많이 됐습니다. 저희 가정의 경우, 주 양육자는 제가 돼야 한다는 걸 잘 알았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개인적으로는 계속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정인이 양부에 대해서 추측해 보겠습니다. 정인이 양부는 스스로 나서서 정인이를 학대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대 정황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학대를 방치했습니다. 아내랑 맞서기 싫어 정인이에 대한 학대를 보면서도 무시했습니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만 보아도 양부의 말은 책임 회피성 발언이 전부입니다. 오히려 정인이를 가학하는 데 협조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사람이 죽어가는 데 그대로 방치하거나 관망했다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이 아빠일까요? 그는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었을 목회자 자녀입니다. 그런데 그의 실체는 ‘강도를 당해 죽어가는 사람의 겉옷마저 훔쳐 달아나는 인간’이었습니다.

◆ 정말 입양이 문제일까요?
입양에 날을 세우는 언론이나 전문가는 본질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 심리학 실험을 봐도 인간의 가학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대표적인 실험이 교도소 실험과 전류 실험입니다. 교도소에서 죄인과 교도관 역할을 구분해서 실행하면 어느 순간 교도관이 죄수 역할자를 진짜 죄수처럼 가혹하게 대합니다. 그리고 죄수도 실제 죄수가 아님에도 죄수처럼 변합니다. 전류 실험에서도 가해자는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서도 치사 수준의 전류를 흐르도록 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실험을 보면, 가학은 정인이 양부모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모든 인간에게 가능한 일입니다. 양부모를 ‘악마’에 비유하기도 하는데, 인간은 누구나 모두 그렇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현재 사회적 분위기는 ‘입양 부모’였기에 친자녀가 아닌 정인이에게 폭력을 가하고, 죽음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실제 통계를 보면, 자녀 학대 사건의 가해자는 친부모입니다. 성폭력과 관련한 문제도 친가족이 가해자인 경우가 가장 많습니다.

정인이가 양부모의 학대와 가혹한 폭력으로 죽음에 이르렀으니, 정인이에 대한 동정과 분노, 동감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입양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됩니다. 현재 대통령까지 ‘입양’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정도입니다. 다들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여론몰이가 쉬운 방법을 찾은 것 같습니다.

또 2달이 지나니, 둘째 입양 전 위탁가정이 돼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빠르면 앞으로 2달 뒤에 둘째를 데리고 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입양이 실생활로 다가오자, 또 망설여졌습니다. 하지만, 이제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위탁가정으로 경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인이 양부모는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바로 위탁모로부터 아이를 데리고 온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모든 가정이 우리 가정과 같은 절차를 거치는 것은 아니며 위탁가정으로 시작하는 건 각자의 선택입니다. 다만, 이런 과정을 거친다면 제2의 정인이가 다시 나올 확률은 줄어들 것 같습니다.

둘째가 오던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습니다. 우리 부부는 다른 지역으로 가서 둘째를 데리고 왔습니다. 그날 위탁모가 안고 있는 둘째를 아내가 조심스럽게 받았습니다. 아이를 넘겨주면서 눈물을 글썽이던 위탁모의 모습이 아직도 선합니다. 마지막으로 둘째가 입고 있는 옷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둘째를 카시트에 태워 조심조심 운전하여 집에 도착했습니다. 당장은 제가 아이를 돌보기 힘들어서 어머니께 부탁드렸습니다. 이후 약 3주 정도 어머니께서 둘째를 돌봐주셨습니다.

당시 저희가 전해 들었던 아이의 상황을 간단히 설명할까 합니다. 아이는 친부모의 피치 못할 상황으로 인해서 입양기관에 위탁되었습니다. 친부모한테서 떨어진 후 임시 부모를 만나며, 대부분 위탁 부모를 경험하고 양부모에게 입양됩니다. 혹, 저희처럼 위탁을 하다가 법원 결정에 따라 최종적으로 입양승인이 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아이는 또 다른 부모를 찾아 떠나게 됩니다. 아이는 보통 최소 3번의 다른 부모를 경험합니다. 이 과정이 통상 태어난 지 1년 내외의 아이가 겪는 일입니다.

정인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친모를 떠난 뒤 위탁모와 8개월 정도 함께 있었습니다. 이때 정인이의 엄마는 위탁모입니다. 그러다가 양부모에게로 간 것입니다. 1살도 안된 아기가 8개월 동안 엄마로 알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떠나 낯선 양부모를 만나게 된 겁니다.

말을 못하는 아기지만, 이 아이의 심정이 어떨까요? 그 심정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언론에서 아이들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생각하면서 입양을 떠들어 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방송 분량을 만들기 위해 형식적으로 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입양가정은 정인이 양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극노함 못지않게 무지한 언론과 전문가 행세를 하는 패널들에게 분노하는 겁니다.

둘째가 집으로 온 날 방이 추웠는지 감기에 걸렸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안타깝습니다. 따뜻하게 해준다고 했지만, 둘째에게 모든 상황은 정말 낯설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심지어 울지도 않았습니다. 잠투정도 없었습니다. 첫째와 비교하면 육아하기 정말 쉬웠습니다. 특히, 100일이 지나고 우리에게 온 상태라 육아 부담이 별로 없었습니다. ‘기적의 100일’이라는 표현은 아이를 키워 본 부모라면 다 아는 사실입니다.

정인이는 8개월이 지나 양부모에게 왔습니다. 다시 말해 잠도 길게 자고 먹기도 쉽게 먹을 수 있는 성장 상황입니다. 그리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기간이다 보니,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였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인이는 정말 생리적으로 어려운 부분이 아니고서는 울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양모는 “아이가 잘 울었다”고 했는데, 이건 바꿔 말해 생리적인 부분을 제대로 해결해주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걸 제대로 주지 않았고,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아서 아이가 울었다는 말입니다. 말을 잘못하는 아이에게 울음은 “필요한 것을 달라”는 호소입니다. 그 호소를 양모는 들으려하지, 아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육아 경험이 일천했기 때문입니다. 8개월이 지난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저 같은 초보 육아 아빠도 할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갓 100일이 지나서 만난 둘째는 하룻밤 새 3번의 수유가 필요했습니다. 시간이 지나 2번으로 줄었고, 이내 곧 잠자기 전 한 번으로 줄었습니다.

아마 정인이도 자기 전에 한 번 정도 수유하면 다음 날 아침까지 잘 잤으리라 생각합니다. 양부모는 그 정도도 해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지 못한 걸 미안한 게 생각한 게 아니라 그 정도도 감당하기 힘들다고 아이에게 폭력을 행사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수준의 양부모가 첫째를 제대로 양육했을까요? 당연히 아닙니다. 당연히 양부도 제대로 첫째를 양육한 경험이 없다고 확신합니다.

우리 둘째를 생각해 보면, 첫 돌이 되기 전까지 잘 울지 않았습니다. 고집도 부리지 않았습니다. 첫 돌이 되기 전 가족 여행을 베트남으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첫 돌이 지나지 않았으니 장시간 비행이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둘째는 울지 않았습니다. 비행 내내 제가 둘째를 안고 서서 얼르는 정도였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한 번도 투정 부리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같이 여행하는 어른들께서 “아이가 있는데, 이렇게 조용할 수가 있나? 참 신기한 일이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우리 부부는 그때만 해도 우리 둘째의 타고난 성격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4살이 된 지금의 둘째는 투정도 잘 부립니다. 그리고 고집도 셉니다. 5살 많은 언니와 대결해서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이를 통해 볼 수 있는 건 아이가 새 가족을 만나 적응하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둘째의 경우, 최소 1년 이상 걸린 듯합니다.

그러나 정인이는 입양된 지 9개월 만에 사망했습니다. 아이는 가정에서 적응할 시간도 얻지 못했습니다. 도착하고 나서 얼마 후부터 양부모의 학대가 이어졌으니, 적응은 불가능했습니다. 매일 공포를 느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울면 수건을 덮어버리고, 심할 때는 폭행이 이어졌습니다. 뼈가 부러질 정도로 폭행을 당했어도 고통을 호소하지 못했습니다. 아프다고 울면, 더 큰 폭행을 당할지 모른다는 것을 육감적으로 알았을지도 모릅니다.

정인이가 짧은 인생을 통해 경험한 세상은 온통 부정적이고, 참혹한 곳이었습니다. 자신이 가장 의지해야 할 부모, 자신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줘야 할 부모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정인이에게 부모란 폭력과 폭언을 행사하는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공포, 두려움, 고통 등으로 얼룩진 세상만 경험하다가 눈을 감아야 했습니다. 새로운 부모와 가정에 적응할 시간도 전혀 갖지 못한 상태에서 매시간 위축되고 불안한 심정으로 매일, 매시간, 매분, 매초를 살다가 떠난 겁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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