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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사건 특별기고(3)]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입니다

윤준식 기자 승인 2021.02.01 12:39 의견 0

최근 정인이 사건으로 네티즌 사이의 공분이 하늘을 찌르는 듯했습니다. 심지어 신년을 맞아 진행된 대통령 기자회견에서도 정인이 문제가 회자되기도 했습니다. 입양에 대한 인식과 방법론 모두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현실입니다.

때마침 <시사N라이프>는 의미있는 투고를 받았습니다. 입양 경험을 가진 한 아버지로부터 입양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사연이었습니다. 정인이 사건을 시청률과 조회수를 높이는 데 활용하는 언론에 대한 불신도 토로했습니다.

이에 독립언론을 지향하는 <시사N라이프>에 무명으로 투고한다는 당부를 남겼습니다. 총 3회에 나누어 연재되는 솔직한 심정과 사연을 통해 독자 여러분께서 정인이 사건과 입양에 대한 생각의 범위를 넓히시는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정인이에게 너무나 무서웠던 세상

입양은 참 좋은 일입니다. 저도 항상 아내한테 “내가 태어나서 정말 잘한 일이 있다면, 바로 둘째를 맞이한 일이야.”라고 말하곤 합니다. 왜 좋은 일인가라는 답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1순위는 거의 같다고 생각합니다.

1순위는 바로 ‘아이의 행복’입니다. 양부모의 만족도 아니고 (육아를 다시 시작하는 게 어떤 만족을 줄 수 있을까요?), 사회 정의나 사회봉사(일반적으로 공개 입양이 아닌 경우 정말 가까운 지인이 아닌 이상 입양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사회 정의나 사회봉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도 아닙니다. 당연히 개인의 자부심을 높이는 일도 아닙니다.

인간은 신이 아닙니다. 그래서 미래를 쉽게 예측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사에 항상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생명을 돌보는 일은 어느 때보다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아이를 양육하는 이유는 오로지 아이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 그래서 아이가 온전하게 성장하는 데 조금이나마 돕겠다는 게 입양과 양육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만약 아이가 행복하지 않다면? 입양과 양육은 실패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부모가 하는 게 아니라 자녀들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인이 양부모는 정인이의 행복보다 그들의 만족이 훨씬 우선했습니다. 정상적이지 않은 상시 공개, 그리고 주변의 찬사에 만족감을 느끼면서 동시에 양부모는 정인이에게 고통을 가했습니다. 카페에 가서도 아무도 묻지 않았는데도 입양 사실을 먼저 이야기했다는데, 정신병적인 관종이 아니고서는 그런 행동을 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입양아는 그렇게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의미였을까요?

둘째가 오고 나서 처음에는 미안한 감정이 항상 있었습니다. ‘우리 부부보다 더 좋은 부모와 더 좋은 가정을 만났다면, 더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을텐데.’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더 행복해질 기회를 막은 거 같았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둘째는 저를 만나서 행복하고, 저도 둘째를 만나서 정말 행복하다는 걸 진심으로 믿습니다.

둘째를 주로 돌보는 사람은 저였습니다. 그래서 둘째는 엄마를 찾기보다는 항상 아빠 품을 찾았습니다. 최근에는 엄마를 더 찾는 상황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의 품은 절대적이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상황에서는 항상 “아빠!”를 외쳤습니다. 둘째는 갓난아기 때부터 어려운 상황에서는 주 양육자가 도와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달리 생각해보면, 아이가 주 양육자 외에 다른 가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는 시간은 더 길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정인이는 주 양육자의 잦은 폭력으로 인해서 다른 가족들을 받아들일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양부조차도 가해자로 판단되는 상황이니 정인이는 매일매일 생지옥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정인이는 의지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양부모와 함께한 8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자체가 처절한 비극이었습니다.

사망 열흘 전에 출연한 방송 프로그램을 보니, 정인이가 박수하면서 웃는 모습이 등장합니다. 양모의 변태적인 관종 의지는 심신이 죽어가는 아이를 억지로 데리고 방송까지 나오게 합니다.

양모에게 정인이는 자신의 관종을 위한 도구였을 뿐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을 알면서도 관여하지 않고, 동조한 양부 또한 다를 바 없습니다. 양부는 잘 몰랐다고 합니다. 거짓말입니다. 매일 정인이를 봤으면서 모를 수가 있었을까요? 그는 정인이에게 체벌까지는 아닐지라도 가혹행위를 가했던 사람입니다. 돌이 갓 지난 아이한테 강제로 다리를 벌리고 서게 한 정황이 있는데, 아주 조금이라도 자기 딸이라고 생각했다면, 그런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솔직히, 두 아이를 키운 경험을 생각해 볼 때 정인이 정도 되는 아이한테 벌을 주면, 그 말을 제대로 따를 수 있는 아이는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정인이는 그 가혹행위를 몸으로 다 겪어냅니다. 얼마나 두려웠으면 양부의 가혹행위를 그대로 따랐을까요? 그리고 얼마나 무서웠으면, 제대로 서지도 못한 아이가 아빠의 한마디에 일어나서 걸었을까요?

◆ 정인이를 위한 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변호사를 위한 돈은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둘 다 재판받는 상황에서 두 부부는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이런 부분을 보면, 부부관계 또한 좋지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흔히 말하는 쇼윈도 부부입니다.

법정에서 양부는 양모와 선 긋기를 하고 있습니다. 양부의 심정은 간단합니다. ‘결혼 잘못해서 이런 험한 꼴을 당한다.’입니다. 그가 흘린 눈물은 절대로 사죄의 눈물이 아닙니다. 이 상황까지 오게 한 아내에 대한 원망과 억울함의 눈물입니다.

양모는 살아남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과거 정신과 진료까지 운운하면서 최대한 형량을 낮추기 위해서 별짓을 다 하고 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본인이 살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1년 4개월을 살다 간 정인이는 이런 발버둥도 쳐보지 못했습니다.

인면수심(人面獸心) 양모의 말을 변호사들은 믿는다고 공언합니다. 왜냐하면, 수억 원의 돈을 받았으니까요. 기본 약정 수임료는 물론, 성공 보수도 별도로 있다고 합니다. 이 돈의 반의반만이라도 정인이를 돌보는 데 사용했다면, 정인이는 아직 세상에 남아 웃고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양부모는 정인이를 입양한 후 곧 추가 대출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코로나와 관련한 정인이 지원금을 문의하기도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현재 변호사 선임비를 보면 아파트 총 대출금과 비슷한 수준입니다. 아마도 정인이의 조부모들이 양부모들의 변호비를 지원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양모의 아버지는 이 사건이 터지자마자 막대한 비용으로 로펌을 선임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교회 목사가 수억 원 이상의 자금을 쉽게 사용할 수 있을까요? 만일 그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없다고 한다면, 교회 예산도 횡령했을 거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봐야 합니다.

돈이 참 좋기는 좋은 듯합니다. 변호인들은 아주대학교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사람들입니다. 유명한 천안 계모 사건도 맡은 변호사입니다. 주로 악질 가해자 편에 서서 방어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방어력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천안 계모 사건 때 검사의 구형은 무기징역이었으나. 22년 형이 선고됐습니다. 우리나라 현행법을 고려했을 때 22년 선고면 변호사 없이 반성문만 잘 썼어도 받을 수 있는 형량이라고 하네요. 쉬운 말로 형량을 꽉 채운 것이죠. 변호비로 적지 않은 돈을 썼으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판결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항소했겠죠.

이번 사건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차라리 진심으로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선처를 바랐다면, 그나마 정상참작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정황마저 부정하는 상황이니 가증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죽여 놓고 이틀 후에 우아하게 와인을 마신 양부모의 속은 도대체 무엇으로 가득 찬 것일까요?

◆ 제도가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정인이는 누구 하나 의지할 수 없는 지옥과 같은 세상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무서운 지옥의 사자는 바로 부모였습니다. 아직, 양부모에게 적응하지도 못했고 모든 게 낯선 상황에서 어린 정인이는 삶을 체념하고 고통을 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부모의 가학 행동이 이 정도면 언니도 정인이를 구박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둘째가 오고 나서 우리 첫째도 동생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옆에 누워서 지켜보기도 하고, 유치원 친구들한테 자랑도 했습니다. 간혹 유치원에 둘째를 데려가는 날이면, 행복한 마음에 눈이 하트로 가득했습니다. 물론, 둘째가 성장하면서 언니 물건도 뺏고 투정 부리기 시작하니, 때론 동생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동생을 때리거나, 괴롭히면 안 된다는 교육을 계속 받았기 때문에 아직 둘째를 괴롭힌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매는 아빠한테 꾸중을 들을 때면, 특히 언니가 동생을 꼭 안고 방어해줍니다. “제가 다 혼날게요. 동생은 혼내지 마세요!”라고 하면서 눈물로 호소합니다. 저는 이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인이는 양부모로부터 계속 학대받았습니다. 그 모습을 계속 지켜본 언니가 정인이한테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요? 아마도 부모처럼 정인이를 똑같이 대해도 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정인이는 양부모는 물론 언니한테까지 학대받았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부분은 어떤 언론에서도 보도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가정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제대로 양육한 패널이 없으니, 형식적인 이야기만 계속하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합니다. 입양이라는 제도가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문제입니다.

우리 둘째가 처음에 온순했던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다시 어디론가 보내짐, 혹은 버려짐에 대한 불안 아니었을까요? 3번째 부모로 우리 부부를 만났습니다. 그동안 모두 “내가 엄마야!”, “내가 아빠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떠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엄마와 아빠가 또, 바뀌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둘째의 마음에는 엄마나 아빠는 종종 바뀌는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제는 부드러운 엄마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단단한 아빠가 등장합니다. 둘째의 생후 1년간의 삶은 불안과의 싸움이 아니었을까요?

사전 위탁가정이 돼 둘째를 돌보면서 최종 입양까지 4개월을 기다렸습니다. 이 기간도 지자체마다 다릅니다. 서울 같은 경우 1년을 기다리기도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기다리는 동안 정말 불안하고, 초조했습니다. 혹시 ‘둘째가 다른 집으로 가게 되면 어떡하지?’라는 불안이 항상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8년 8월 담당자분에게 최종 입양과 관련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눈물이 났습니다. 그리고 바로 집에 가서 ‘이제 넌 내 딸이야. 아무 데도 안 가도 돼!’라고 마음속 깊이 외치며 둘째에게 전해주었습니다. 당연히 우리 부부는 바로 전화 통화하면서 서로 격려했습니다.

이런 기다림의 심정을 언론에서는 전혀 다루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들은 입만 살았고, 머리만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 하나 입양을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이 없습니다. 가만히 보면, 육아 경험도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나와서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아니라 머리만 재잘대니 공감이 잘되지 않습니다. 절차를 따져대는 인간들인데, 그 과정의 진정성이나 입양 가정의 상황은 전혀 따져보지 않습니다. 그냥 되는대로 여론몰이만 합니다.

대통령께서도 입양은 경험이 없는 부분이니 참모들이 정리해준 원고를 그대로 읽어버리고 맙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인줄 모르면서요. 제도를 보완하는 거? 좋습니다. 그런데, 제도가 얼마나 보완돼야 이런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통계적으로 보면 일반 가정에서 친부모에게 학대받는 아이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자녀계획과 관련한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런 시스템은 없습니다.

제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마음은 모른다고 하지 않습니까? 제발 문제의 본질은 제도가 아니라 인간임을 알아줬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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