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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한잔(16)] 러디어드 키플링(Joseph Rudyard Kipling) 『정글북』

- 시어칸이 일어나 으르렁 댈 일이다

조연호 전문위원 승인 2023.06.22 15:52 의견 0

『정글북』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도 디즈니 애니메이션 등을 통해서 숱하게 보고, 도서관 어린이 서적 코너에 가면 어김없이 어디엔가 꽂혀 있는 작품이 『정글북』이다. 그러나 원작은 우리가 아는 디즈니 어린이 도서는 내용이 많이 다르다. 담고 있는 메시지도 다르고...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은 『정글북』으로 알려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는 1907년 영어권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다. 영국 출신이지만, 태양이 지지 않는 대영제국의 위세가 전 세계의 대양을 누비고 다닐 때 인도에서 태어났다. 『정글북』을 쓸 수 있었던 배경도 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작가들에게 있어서 경험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는데, 키플링의 『정글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모글리와 호랑이 시어칸과의 대결 구도를 중심으로 정글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원작도 시아칸과의 대립을 다루긴 하지만, 스토리의 핵심은 아니다. 그리고 그 대결의 결말이라고 할 수 있는 시어칸은 허망하게 최후를 맞이한다. 모글리의 전략에 걸려 든 시어칸은 아무런 저항도 못한 채 소떼에 밟혀 죽기 때문이다. 나이든 곰 발루, 흑표범 바기라, 그리고 거대한 비단 뱀 카, 늑대의 대장이었던 아케라 등 우리가 애니메이션을 통해 봤던 동물들은 그대로 나온다.

어떤 이유인지, 사람으로 태어난 모글리는 정글에 버려졌고, 늑대들의 회의를 통해서 늑대로 자라게 된다. 그는 발루와 바기라의 가르침을 받아 정글의 법칙, 규율을 익히며 살아간다. 작품은 정글에서 어쩔 수 없이 추방된 모글리가 인간 마을에서 살다가 다시 정글로 돌아오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인간 마을에 머물던 모글리는 정글의 평등이 인간 마을에 없으며,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됐음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욕심을 지니고, 허영심이 가득한 인간들을 경멸한다. 결국, 정글의 평등과 규칙을 어린 시절부터 배웠던 모글리는 인간 세상의 불평등과 악랄함에 치를 떨고 스스로 정글로 돌아간다.(독자에 따라서는 쫓겨난다고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삶은 정글이다?

흔히, 우리는 인생을 정글로 비유한다. 정글은 강한 포식자가 약한 동물을 잡어 먹고 사는 곳이다. 그런데, 정글의 신비는 아무리 포식자가 약한 동물을 잡아먹어도 피포식자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더 설명하면, 포식자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그만 둔다. 거대한 비단 뱀 카를 보자. 한 번에 많은 영양분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일정 기간 잠을 잔다. 다른 포식 동물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인간 세상을 정글이라고 하는가? 정글에 사는 동물이 들으면, 어림없는 소리라고 할 것이다.

인간 세상에 내려갔다가 환멸을 느끼고 돌아 간 모글리를 생각해 보자. 힘도 보통 사람들보다 세고, 동물을 쉽게 다룰 줄 아는–동물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인간 모글리는 인간들에게 배척당한다. 왜? 정직했고 평등을 알고, 스스로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완벽한 인간의 조건을 갖춘 모글리는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인간인 이유로 괴물정도로 취급받고 쫓겨난다. 오히려 모글리가 인간 세상의 부조리함을 비판하며 자신이 원래 살았던 세상으로 스스로 돌아간다고 이해하는 게 옳을 듯하다. 세상은 분명 약육강식의 세상이다. 그러나 정글과 다를 게 있다면,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쉼 없이 돌아가는 코인시장이나, 상상하기도 어려운 수많은 정보가 저장되고 필요한 사람에게 전달되는 클라우드가 멈추지 않는다. 배부르다고 쉬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가리키며 “배가 불렀네.”라고 하며 비난할 것이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고, 그게 당연시 되는 세상이 바로 인간이 사는 구역이다.

긴 수면, 긴 휴식, 포식자가 사냥하지 않는 평화로운 시간 등이 인간 세상에 존재할까? 지금도 많은 사람이 폭력에 노출돼 있고, 혹은 기아로 인해 죽기도 한다. 정글에서의 삶이 오히려 인간 세상의 삶보다 낫지 않은가? 두 세계의 삶을 비교했을 때, 과연 두 세상이 닮았다고 할 수 있을까?

◆디즈니가 담지 못하는 원작의 메시지

나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 영상미도 좋고, 나름 좋은 교훈도 담고 있어서 아이들과 같이 즐겨도 좋은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원작을 훼손시키는 경우도 있다. 원작이 담고 있는 내용이 순화되기도 하고, 트렌드에 따라 내용을 각색하기도 한다. 그래서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본다면, 반드시 원작을 먼저 읽어 보기를 권한다.

디즈니의 『정글북』은 원작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했다. 인간 아이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라고 정글의 왕이 된다는 메시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역시 인간이 최고야!”라는 생각은 할 수 있을 듯하다)

“용감한 마음과 겸손한 혀”를 지닌 동물들이 철저히 규율을 지키며 살아가는 정글. 키플링은 이런 정글을 영국으로 생각한 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우회적으로 인도의 원시성을 비판한 것인지도.

이런 제국주의 성격을 비판하기 전에, 원작은 평등을 다루고, 존중을 다루고, 상호공존을 다룬다. 시어칸이라는 독선적인 캐릭터는 결국 몰락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아울러 민주적인 늑대 무리도 그 리더가 약해질 때, 언제라도 흩어지고 강자가 지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최초의 여성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라겔뢰프의 『닐슨의 모험』에서도 좋은 까마귀 무리의 리더가 힘없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데, 두 작가는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보여주면서 힘없는 민주주의는 언제라도 독재로 전환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서로 존중하지 못하는 세상

정치는 타협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 타협은 주고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타협하는 가운데, 불법적인 요소가 오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타협은 정치가 이뤄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다. 아울러 타협은 강한 힘으로 상대방을 억누르지 않음을 의미한다. 적어도 상대방 의견을 듣고, 반영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정치는 타협을 잃어버렸다. 그냥 반목이 전부이다. 서로 귀를 막고 있으니, 정치가 이뤄지지 않는다. 정치가 이뤄지지 않으니, 제대로 된 정책이 나올 리 없다. 최근에 우리 대통령은 “100년 전 일로 일본이 무릎 꿇어야 한다는 생각 안 한다”라고 인터뷰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정말로 좋은 일이다. 사실 4대 성인 중 한 명인 예수도 그를 고문하고 십자가 극형으로 몰고 간 사람들을 용서했다. 이후 그의 제자들도 스승을 본받아 순교했고...

그러나 정치는 종교가 아니다. 종교가 정치화 되면서 종교는 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관용을 잃었다. 정치는 무조건 배품이 아니라 고도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100년 전 일을 꺼내지 않겠다고 했다면, 그것으로 인해 얻어내는 것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현 대통령은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자선 사업 혹은 종교 행위를 하는 것이다.

기업의 총수도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책임지고 물러나는 경우가 있다. 회사에 이익을 주지 못하고 손해만 끼쳤다면, 당연히 현직에서 물러나야 한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타협에서 얻은 게 없이 잃는 것만 있다면, 당연히 물러나야 한다. 혹은 만회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많은 정치인이 실수를 하고 나서 한결같이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그런 말을 내뱉는 사람치고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그저 언어도단(言語道斷)일 뿐이다.

정글은 인간보다 지능지수가 훨씬 모자란 동물들이 사는 터전이다. 그런데도 정글은 인간의 개입이 없고, 큰 자연재해가 닥쳐오지 않는 한,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동물적 본능에 따르지만, 그 본능도 타협하며 진화한다.

배가 부르면 사냥하지 않는다. 배가 부른 사자 앞에 어린 망아지가 뛰어 놀아도 사자는 쳐다보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포식한 뱀은 깊은 숙면에 빠진다. 이런 본능적 타협이 있기에 약한 동물들이 또 새끼를 낳고 기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할 수 있다. 상호생존을 위한 본능적 타협인 셈이다.

그런데, 현재 우리나라는 이런 본능적 타협의 시간이 없다. 서로 반목하고 존재 자체를 밟아 짓누르기에 여념 없다. 우리 세상이 정글이라고? 소 떼에 밟혀 죽어 치욕스러운 죽음을 당한 시어칸이 벌떡 일어나 으르렁 댈 일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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